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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행촌' 에세이모음
작성자 신기정
작성일 2008-10-24 (금) 05:10
홈페이지 http://blog.daum.net/crane43
ㆍ추천: 0  ㆍ조회: 2704      
가을 내리기
가을 내리기
                              행촌수필문학회 신기정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푸시라고 릴케(Rainer Maria Rilke)가 기도하던 가을이다. 지난 여름 폭염에 해시계마저 넋을 놓아버린 것일까? 두어 차례 서늘한 예고에 짧은 옷들을 이미 정리했음에도 여름의 긴 꼬리는 아직도 가을 문지방 위에서 머물고 있다. 소슬한 가을비라도 수인사를 건네야 도마뱀처럼 미련 한 토막을 남기고 여름이 떠날 것 같다.


더디 온 가을 탓에 곳곳에서 동식물들이 겪는 홍역이 눈에 띈다. 예년 같으면 이미 나목이 되었을 활엽수들이 상록수인 듯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일부는 열매 위로 새봄에나 써야할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한다. 잎에선 진즉 번데기가 되었어야할 유충들의 굼뜬 움직임이 애처롭다. 처서(處暑)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는 얄미운 모기조차 두 달이 넘도록 여전히 성화다. 그러나 머지않아 북녘 끝자락에서 시작된 단풍이 가쁜 숨으로 달려와 주변을 곱게 물들일 것이다. 자연의 수레바퀴는 흔들림은 있어도 곧 제 길을 찾기 때문이다.


가을은 마름의 계절이다. 만물이 물기를 말려 한겨울의 얼어붙음에 대비한다. 시골 지붕 위엔 덩실한 호박이 마르고, 토담 아래 멍석에선 온갖 나물이며 태양빛을 닮은 고추가 선텐을 한다. 나뭇잎은 물기가 마르니 체액이 농축되어 단풍이 든다. 큰 일교차가 이슬을 선물하지만 이미 숨구멍을 닫은 잎사귀는 타는 목마름만 더할 뿐이다. 잎들은 가을 햇살의 유혹에 새벽이슬을 털어내려다 그만 한 해의 숨을 놓아 버린다.


가을은 연극의 계절이다. 풍성한 결실의 기쁨과 수확 뒤의 허전함을 함께 맛보게 한다. 자연이 그려내는 풍경화에 취하고 소슬한 바람에 움츠러든 사람들은 계절성 시인이 된다. 책갈피에 은행잎 하나 접어 넣으며 낙엽처럼 자유낙하하는 고독을 그들은 ‘가을을 탄다’고 적는다. 마지막 햇살 한 줌이 아쉬워 울긋불긋 원색의 옷을 입고 단풍 속으로 물들어간다. 이들의 뒤늦은 조급증을 릴케는‘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는다'고 적었다. 찬바람이 드세지면 여린 새 가슴들의 습작활동도 잦아들 것이다.

가을은 완숙의 계절이다. 온갖 과일들이 볼이 터져라 덩치를 불리고, 산야의 잡초들은 대지의 품에 씨앗을 내린다. 먼 길을 달려온 철새들은 곤한 날개 깃을 접고, 뜨겁게 부풀어 올랐던 대기도 수은주 눈금을 내린다. 동물들은 촘촘한 털로 옷을 갈아입고, 파충류는 스스로 입을 봉하고 겨울잠에 든다. 만약 풍성한 곳간에 취해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가을은 서릿발을 세워 경고를 준다. 인생의 온갖 풍상을 겪은 듬직한 원로처럼 말없이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것이다.


가을은 시작의 계절이다.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져도 희망의 싹과 꽃눈만은 고이 간직한다. 혹한기를 버텨낸 씨앗들의 인내와 자기희생이 있어 세상 만물은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온 우주가 가을이 맺은 씨앗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버린 모란을 보는 영랑(永郞)의 봄은 아쉽고 섭섭하지만,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누님 같은 국화꽃이 있는 미당(未堂)의 가을은 든든함과 희망이 있다.


가을은 내림의 계절이다. 훌훌 털어 자연으로 돌려놓고 미련 없이 제 길을 재촉하는 나그네다. 봄은 꽃바람을 타고 북으로 오르지만, 가을은 애잔한 단풍편지를 남으로 띄운다. 봄은 타는 것이요, 가을은 내리는 것이다. 봄꽃 길은 휴전선에서 멈춰야 하지만 단풍 길은 한라산까지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어 더욱 좋다. 단풍 길의 무한질주가 봄꽃 길의 막힘없는 북상으로 이어지길 소원해 본다. 올 가을은 서운하지 않을 만큼만 타고 ‘가을 내리기’ 그 버림의 미학을 배워야겠다.

                         (2008.10.23.)  




주) 인용시 : 릴케 ‘가을날’, 영랑(永郞) 김윤식 ‘모란이 피기까지는’, 미당(未堂)  서정주 ‘국화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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