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은 우리나라의 대표 음식이다. 불그스레한 고추장을 생각하면 저절로 입속에서 침이 나온다. 고추장의 고장, 순창에 사시는 큰누님이 직접 농사를 지어 만들어 준 고추장은 토종 고추장으로서 정말 맛이 일품이다. 시중에 사서 먹는 그 맛과는 다르다. 일본에도 고추장이 있는지 모르겠다.
4월 초 오사카를 후배 부부들과 함께 찾았다. 3일째 되는 날, 오사카성을 관광했다. 관광안내자가 퀴즈를 내며 맞춰보란다. 원시시대에 부족국가의 우두머리가 누구냐고 묻기에 우리는 추장이라고 대답했다. 추장보다 더 높은 사람은 바로 고추장이라고 했다. 고추장보다 더 높은 사람은 초고추장이고, 초고추장보다 더 높은 사람은 태양초고추장이란다. 그러자 일행 중 한 사람이 태양초고추장보다 더 어른은 막장이라고 하여 모두가 웃었다. 웃자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관광안내자는 오늘 운이 좋으면 오사카성에서 고추장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고추장은 교포 할아버지가 키우는 개로 8년 전부터 파란 선글라스를 끼고 오사카성을 날마다 산책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올 때마다 가이드도 고추장 만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는데, 요즘 서너 달은 만나지 못해 많이 아쉬웠단다. 8년 전에 조그마한 강아지였는데, 이제는 고추장도 나이가 들어 중년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고 젊은이들은 예의를 갖추라고 하여, 모두가 웃었다. 고추장으로 인연을 맺어 만나는 날이면 교포 할아버지가 무척 반가워하며, 호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주기도 하고 서로 안부를 묻곤 한단다.
오사카성에 도착하니 입구부터 벚꽃으로 화려했다. 오사카를 상징하는 오사카성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년에 걸쳐 날마다 3만 명을 동원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우리 교포들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어마어마한 그 성을 바라보니 그 당시 그의 권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성은 본래 성의 20% 정도밖에 안 된다. 성 입구에 들어서자 많은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성의 정문에는 거대한 바위로 만든 성벽이 우릴 압도했다. 사람 키의 세 배쯤 되는데, 하나의 돌 무게가 130t이란다. 어떻게 저렇게 큰 돌을 여기까지 옮겨 왔을까?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뇌리에 스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여유를 갖고 천천히 오사카성을 둘러봤다. 천수각, 오사카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화려하고 멋스러운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건물은 높이가 35m로 외부에서 볼 때는 5층 건물이지만, 내부로 올라갈 때는 8층이다. 1층에서 7층까지는 박물관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업적과 역사를 전시한 공간이었다. 엘리베이터는 5층까지 운영하지만 내려올 때는 걸어서 내려와야 한다. 8층이 전망대인데 높이가 낮아 풍경 일부만 보게 되어 조금 아쉬웠다.
오늘은 영상 25도! 가이드를 따라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녹차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으니 맛이 일품이었다. 벚꽃의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도 감상하고, 처음 보는 꽃과 나무들도 보고,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파고 물을 채운 곳)로 만든 작은 호수도 보고, 그 위에 떠다니는 배와 푸른 하늘도 감상하다 보니, 휴식처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오사카성의 천수각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호코쿠신사가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일본인에게는 일본을 통일한 사람으로 대단한 존경을 받으며 신사까지 지어 놓은 것이라니, 나로서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신사 입구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이 서 있는데, 동상을 보는 순간 적개심이 타올라 나는 신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벚꽃이 화려한 경내를 산책하는데, 누군가 “고추장이다!”라는 소리에 관광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가이드가 ‘고추장’ 이야기를 했는데, 운 좋게 고추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파란 선글라스에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머리에는 두 개의 예쁜 핀을 꽃은 모양이 우리 손녀딸 어렸을 적 모습을 연상케 했다. 몸통에는 노란 원피스를 두른 자태가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관광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칠십 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나이든 고추장을 벗 삼아, 이곳을 날마다 산책하며, 노후를 보내는 것 같았다.
교포 할아버지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그 모습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처음엔 반가워 모두가 사진을 찍고 큰소리로 고추장을 불렀지만, 차별이 심한 이곳에서 살다 보니 강아지에 의지해서 삶을 지탱한 것은 아닌지, 가슴이 아리어 왔다. 혹시 저 고추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생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다시 태어나, 우리 교포 할아버지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저 할아버지는 한국 고추장의 매운맛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성을 건설할 당시 무참하게 희생된 교포 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로 재탄생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침략의 대가(代價)를 받으러 날마다 오사카성을 드나드는 건 아닐까?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는가 싶더니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발길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할아버지와 고추장을 보며 우린 한동안 허공만 바라 볼 뿐, 아무도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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