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의 수양버들 가로수에는 푸르른 봄물이 올랐다. 연둣빛 잎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생머리처럼 꽃샘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세상은 하 수상하고 어지럽지만,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3월 둘째주 토요일, 우리 집 꿈동이 손자 영섭이 손을 잡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니, 어린 시절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처럼 가슴이 설렜다.
손자들이 어렸을 때는 기쁨을 찾아 주어야 한다. 기쁨으로 뛰놀고, 노래하고, 커가는 손자들을 보노라면 가슴이 벅차고 흐뭇해진다. 봄동산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이 밤이슬을 먹고 자라듯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랑과 칭찬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보람찬 일인가. 한 포기의 꽃이나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볼 때도 나는 생명의 신비를 맛본다. 하물며 사랑하는 손자가 벌써 5학년이 되어서 오월의 신록처럼 싱싱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내 인생에서 최상의 즐거움이다.
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은 아이들 말로 '놀토'라고 한다. 노는 토요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무작정 노는 날이 아니다. 가정에서 어른들과 함께 즐거운 현장체험학습을 하라는 날이다.
이제 5학년인 큰손자 영섭이는 오래 전부터 서울중앙박물관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잘 되었다. 이날은 오후 5시 반에 서울에서 열리는 한밤의 사진편지 1,000호 발행 축하회에 가는 날이다. 손자와 즐거운 추억을 만들 서울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다. 내리사랑이란 말은 진리다. 자식을 기를 때보다 손자가 더 예쁘고, 사랑스런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8시 30분 전주를 출발한 고속버스는 봄날 상큼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신나게 달려서 2시간 45분만에 남부터미널에 내려 주었다. 터미널에서 나와 남부순환도로 육교를 건너서 5분 정도 걸으니 서울의 명소 '예술의 전당'에 이르렀다. 연중 오페라를 비롯하여 연극, 영화, 무용 등을 공연하고, 사진, 미술, 서예, 조각,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공연관은 1층~ 2층까지 로비만 돌아보고, 동편의 전시관을 1층~3층까지 둘러보고 나왔다.
다음은 서울의 심장, 남산으로 향하였다. 남부터미널 지하철 3호선을 타고→교대→고속터미널→잠원→ 신사 →압구정 →금호 →약수→충무로에서 환승하여 4호선으로 갈아타고 명동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니 바로 남산 케이불카 승강장과 연결되었다. 우리 영섭이는 인터넷으로 서울지하철 노선도를 출력하여 갖고 와서 지하철노선도를 보여 주면서 설명해 주는데, 나보다도 지하철 노선을 훨씬 잘 알고 있었다. 참으로 신통했다. 명동역에서 나와 퍼스픽호텔 뒤로 200m정도의 골목길을 걸으니 바로 남산케이불카승강장이었다. 케이블카로 남산의 정상에 올라 봉수대와 주변을 돌아보니 서울 중심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 왔다. 영섭이는 남산의 이곳저곳, 서울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신바람이 났다. 한참 관망한 뒤 남산타워로 갔다. 남산 정상에서 400m 높이로 된 타워 전망대에 오르니 온통 서울복판의 빌딩 숲이 성냥갑 쌓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작년에 불에 탄 남대문(숭례문) 복구현장, 서울역, 롯데호텔, 정부종합청사, 청와대 등이 모두 한눈에 들어 왔다. 남산은 서울 복판에 있는 낮은 산이지만, 올라보니 능선이 길고 아주 거대한 산이요, 넓고 넓은 녹지공간으로 서울의 허파노릇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서울의 명소를 내가 대충 설명해 주고, 간식을 들면서 휴식을 한 뒤에 다시 내려와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했다. 내려올 때는 동부우회로로 걸어보니 70년대에 서울의 귀족학교요 명문 사립학교인 리라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났다. 노란 학교 건물과 노란 스쿨버스는 옛 모습 그대로지만, 서울이 외곽으로 발전하면서 리라도 한풀 가고 김이 빠진듯한 모습이었다. 리라교문 코앞에는 숭의여자대학교 캠퍼스가 산비탈에 거대한 몸집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영섭이 손을 잡고 남산의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면서 몇 분 걸어 내려가니 바로 명동지하철 입구였다. 다시 충무로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역코스로 강남 양재역에서 하차하여 은광여고 앞을 지나 5분정도 가니 목적지인 도곡동 아파트에 당도했다. 도곡동은 강남에서도 최상급 아파트단지다. 마침 제 사촌형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영섭이는 제 사촌형을 만나니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정확히 오후 5시였다. 어쩌면 예정시간과 착오 없이 제 형네 집에 도착했다며 좋아했다.
나는 곧바로 오늘 행사장으로 향했다. 양재역에서 남부터미널, 다음 교대역 1번 출구로 나가니 행사장 건물이라서 찾아가기 좋은 곳에 장소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5시 30분, 개회시간에 1초도 늦지 않게 잘 도착하여 행사에 참여했다. 식순에 따라 축하회를 갖고 만찬을 들며 서울음대 교수의 섹스폰 연주를 감상하면서 여흥을 즐긴 뒤 8시 30분에 해산했다. 나는 다시 도곡동 아파트로 가니 영섭이는 제 형과 pc방에 가서 신나게 게임도 했다면서 반가이 맞아주었다.
“할아버지! 정확히 오신다는 9시네요.”
영섭이는 오늘 모든 일정에 칼날 같이 시간을 맞춘 것에 매우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은 제 형네 가족이 교회에 가기 때문에 서둘렀다. 조반 후에 8시까지 양재역에 태워다 주어서 우리는 어제처럼 충무로까지 가지 않고, 중간지점인 옥수역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중앙선 국철로 갈아타고 한남→서빙고 →이촌역에서 내리니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서 중앙박물관 매표소에 가니 정각 9시였다. 직원이 출근하여 막 문을 여는 순간, 이날 1호 손님으로 입장하게 되었다. 매표는 해도 입장료는 무료였다. 홍보기간이라 무료라고 했다. 그런데도 매표를 하는 것은 입장객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라니, 참 어이가 없었다. 본관 1층 로비로 입장하니 서편에 어린이박물관 안내 표시가 눈을 끌었다.
말은 어린이박물관이지만 내용을 코너마다 돌아보니,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었다. 몇 가지 모형을 탁본하는 스탬프도 찍어본 영섭이는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듯 했다. 오히려 남산에 있는 서울교육청 과학관이 다양한 체험학습이나 관찰학습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알찬 내용이었다. 다음은 서관 전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시관은 1층 중앙복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문화재를 전시해 놓았고, 2층 3층은 도자기를 비롯하여 희귀한 고고자료와 개인 소장품을 기증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층까지 두루 둘러보고 나서 일층 로비로 내려오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였다. 마침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 사는 내 평생동지 L이 바물관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었다. 11시 30분까지 박물관은 충분히 돌아보았다. 박물관 안에는 음료수를 들고 들어갈 수 없고, 군것질 할 곳도 없었다.
이곳은 본래 미군핼기장이 있던 곳인데, 미군부대가 이동하니 박물관을 이곳에 세웠다는 것을 이번에 가보고 알았다. 박물관 입구 휴게실로 나와서 간식을 들고 2년 만에 친구와 만나 회포를 풀면서 점심을 함께 했다. 아무리 박물관 휴게실이라지만 캔 맥주 하나도 팔지 않아 섭섭했다.
오후에는 이촌역에서 삼각지로 가서 전쟁기념관을 보여 주기로 했다. 국방부청사 바로 건너에는 본래 육군본부가 있던 자리인데 육본이 떠나고, 그 자리에 2000년부터인가 전쟁기념관을 세워서 개방하고 있다. B-29 전투기를 비롯해서 공군비행기, 전차, 대포, 고사포 등 각종 전쟁무기들을 전시해 놓아서 어린이들도 볼 것이 참 많았다.
다 돌아보고 용산역으로 나왔다. 용산역은 전자랜드 매장까지 있고, KTX를 비롯하여 각종 열차의 시발역으로 매우 혼잡했다. 역사(驛舍)도 고층빌딩이어서 옛날 용산역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역 로비에서 친구와 작별하고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니 전라선 무궁화호가 홈에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3시 5분 전라선 하행열차 시간에 정확히 맞추었다. 다행이 전주에서 이틀 전에 표를 예매했기 때문에 좌석도 잡고 시간도 여유있게 탑승했다. 우리 영섭이가 기차여행은 별로 해보지 못했기에 올 때는 열차를 타기로 한 것은 잘했으나, 전주까지 3시간 30분이나 걸려서 지루하였다.
아무튼 5학년 3월에 우리 꿈동이 손자와 함께 한 1박 2일 서울나들이는 시간계획을 정확히 맞추면서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보람찬 여행이었다.
(09년 3월14~15일 서울중앙박물관을 다녀와서 소감을 쓰다. 09.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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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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