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이수홍
ㆍ작성일	2009-08-28 (금) 04:23

ㆍ추천: 0 ㆍ조회: 3145

건지산(4)
건지산(4)
- 인생사는 윷놀이다 -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수홍

오늘도 건지산에 오른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깝다. 아침 일찍 오를 때는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내려온다. 요즘은 주로 오후에 간다. 처음부터 경사진 곳을 오르면 숨이 차고 힘이 든다. 많이 걸으려고 경사가 낮은 긴 코스를 택하여 한 바퀴 돌고 온다.

정상에서는 우리 집과 홈플러스가 보인다. 그곳에는 모정도 있고, 비를 맞지 않게 지붕을 만든 ‘건지회관’도 있다. 모정에서는 바둑과 장기를 두고 건지회관에서는 멍석을 펴놓고 윷놀이를 한다. 윷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50에서 80대 사람들로 보인다. 건지회를 조직하여 입회비 3만원과 한 달 회비 5천 원을 내고 날마다 노는 사람들이다.
멍석을 펴고 하는 윷놀이는 나도 52년 전 고향에서 했던 놀이다. 그때 우리들의 놀이는 낮에는 윷놀이요 밤에는 ‘나이롱뽕’ 화투였다. 나는 건지회원은 아니지만 윷을 한 번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오늘 오후에 건지회관에 가서 윷을 한 판 놀겠다고 했다. 다 놀고 치우려다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사람들은 백 원을 내고 노는 것을 보았는데 내 또래 되는 사람이 대뜸 천 원 내기를 하자고 했다. 천 원을 내놓고 이겨도 5백 원만 찾아가고 5백 원은 회비로 기부한다는 규칙도 알려주었다. 나는 즐거움도 얻지만 건지산이란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한 놀이라 무조건 찬성하고 놀았다.
옛날 고향에서는 윷을 산수유나무로 조그맣게 만들어 보기도 좋고 던지기도 낫낫했는데 무슨 나무인지 알지 못할 나무로 투박하게 만든 윷이었다. 고향에서 놀 때는 윷을 손가락에 끼고 놀면 원한대로 나온다고 끼지 못하게 깍쟁이를 털라고 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그때는 윷짝이 네 개가 다 멍석 밖으로 나가거나 한 짝이라도 중앙선을 넘지 못하면 낙이라며 던진 것이 무효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짝만 나가도 낙이었다. 나는 보기 좋게 패하여 천 원을 날렸다. 처음 해 보니 손에 익숙하지 않아 네 번이나 낙을 했으니 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승자는 미안한 듯 곱삶아서 한 번 더하자고 했지만 목표달성을 했기 때문에 사진을 찍고 걷기 시작했다.
내기를 하면 단돈 100원을 잃어도 기분은 딴 것만 못하다. 돈 천 원을 잃었으니 딴 것보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천 원 상점에 가면 물건 하나를 거뜬히 살 돈이다. 하지만 글 소재는 얻었으니 천 원을 주고 샀다고 생각하고 5백 원은 상대방에게 또 5백 원은 건지회비에 적선을 했다고 생각하니 걸음이 팍팍하지는 않았다.

옛날 고향 동네에는 유명한 윷놀이꾼들이 있었다. 그들은 많은 돈을 걸고 도박으로 놀았다. 손위에 얹은 윷짝을 안보고도 엎어져 있는지 뒤집어져 있는지 알 정도로 능수능란했다고 한다. 한 번은 도박을 하는 그들을 지서에서 연행해서 학교운동장 구보를 시키면서 제일 앞사람이 사이렌을 들고 틀며 돌게 한 일이 있었다. 도박죄를 지었으면 입건하면 될 것을 그렇게 망신을 주는 것을 처벌로 했으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다. 그들을 사이렌부대라 불렀고 그 중에는 나의 형님도 있고, 나와 친한 친구 아버지도 있었다. 고인이 된 내 친구는 윷놀이를 하면서 사리(모나 숯)가 나오면 한 번 더 놀려고 윷을 주울 때 엉덩이를 상대방 쪽에다 대고 앉으면서
“내가 이래봬도 사이렌부대 鄭XX 아들이다.”
라고 상대방에게 약을 올리며 농담을 했다. 나도 물론
“사이렌부대 李XX 동생이다.”
라고 했다. 자장면 내기를 하고 그 맛이 어찌나 좋았던지 그릇에 묻은 자장을 혀로 핥아 먹어치웠다.

윷놀이는 인생사와 흡사하다. 석을 먼저 푼 사람이 금방 이길 것 같은데 상대방이 느닷없이 사리를 퍼부어 역전이 되는 수가 있다. 인생살이도 흥하다 망하기도 하고 망했다 다시 일어나지 않던가. 윷을 잘 놀고 말도 잘 써야 이길 수 있듯이 인생길을 잘 택해야 출세를 할 수가 있다. 자기가 이기려면 상대방의 말을 잡아야하고 잡으면 잘했다고 한 번 더 논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도 승리를 하면 영웅칭호를 받듯이.

덕진체련공원 6·25한국전참전 기념비 옆과 인후공원 모정에서도 윷놀이를 하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한 번 놀아 봐야지 마음먹었다. 오늘 윷놀이를 하고 근래에 드물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건지산을 크게 돌아 만보 이상을 걸었더니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산책이었다.
[2009.8.14.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