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참 좋은날이다. 음력으로는 정월 열아흐레다. 기왕에 만들어진 날이지만 처음으로 찾아 왔다.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날이다.
가뭄으로 물이 부족하여 여기저기서 야단들인데 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봄을 맞아 싹을 틔우려고 준비 중인 식물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농사짓는 분들도 무척 좋아할 터이니 내 마음도 덩달아 포근하고 흐뭇하다. 그래서 좋은날이라고 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이고, 큰손자 대건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이 겹친 날이기 때문이다. 비는 생일과 졸업을 축하하려고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다. 금상첨화란 이런 때 쓰는 말이려니 싶다.
큰아들과 상의 끝에 아내의 생일과 손자의 졸업축하파티를 따로 할 것이 아니라 졸업식에 참석하고 점심때 함께 하기로 합의했다. 막내며느리가 끓여온 미역국으로 아침밥을 먹었다. 생일파티 리허설을 한 셈이다.
전주 효자동 효림초등학교 제11회 졸업식장으로 갔다. 졸업생 재학생 학부모들로 큰 강당이 꽉 차 있었다. 전체학생 1,260명(39학급, 남632, 여628) 중 졸업생은 237명(7학급, 남116, 여121)이었다. 학부모들은 꽃다발을 든 아이들의 사진을 찍노라 바빴다. 졸업생들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뿜는 불빛이 수많은 반딧불같이 반짝거렸다. 형설(螢雪)의 공(功)이란 고사가 떠올랐다.
59년 전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50여명 졸업생에 여학생은고작 7명이었다. 내 졸업사진은 딱 한 장뿐이었는데 지금은 많이도 변하여 감회가 깊었다. 나는 고슴도치를 닮았나? 내 손자가 제일 잘 생긴 것 같은데 우등상을 받지 못하여 좀 서운하였다.
“1. 비전을 가져라. 2. 목표를 향하여 매진하라. 3. 실력을 양성하라. 4. 이웃을 위하는 사람이 되라.”는 교장선생님의 회고사와 학교운영위원장이자 시의원의 축사가 있었다. 졸업가를 제창하는데 옛날 우리가 불렀던 노래 그대로여서 나도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가사가 앞에 영상으로 떴지만 보지 않고 불렀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기념사진을 찍고 생일과 졸업축하파티장인 ‘신토불이’ 오리 정식 집으로 갔다. 주인공 두 사람과 졸업생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부모,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누나 등 10명이었다. 케이크와 6만 오천 원짜리 정식 두 벌을 시켜 멋진 파티를 열었다. 손뼉을 치며
“사랑하는 할머니 생신과 대건이 졸업을 축하합니다!”
라고 축가를 불렀다. 참석 못한 서울 둘째아들 내외는 축하전화를 하고 용돈을 예금통장으로 보냈단다.
큰며느리한테서 용돈이 든 편지를 받았다. 손녀와 손자도 할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글이 하도 아름다워 여기에 옮긴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
십여 년 전, 어머님의 모임에서 영인이의 당찬 한마디, 성장모습을 자랑하시고자 벌금 만 원을 내고 실컷 자랑하시고 웃으셨다는, 그래서 행복해하셨던 어머님!
저는 요즘 주변 분들에게 자식자랑에 앞서 ‘오늘이 있기까지’를 일장 연설을 하면서 꼭 어머님 자랑을 한답니다. 따지고 보니 저도 자랑하고 행복해했으니 그때와의 시세를 따져보더라도 아마 십만 원 정도는 내고 웃었어야 하는 거 아닌 가싶어 빚이 쌓이네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또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저는 늘 이렇게 살겠습니다. 그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항상 건강하셔서 저의 자랑이 빚이 쌓여 그 빚을 어머님께 다 갚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생신 축하합니다. 늘 덜렁대고 약간 어설픈 큰며느리를 이처럼 아껴주시니 너무 감사하구요.
2009. 2. 13. 큰며느리 은주 올림
TO, 할머니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희는 큰손녀와 손자 영인이, 대건이에요. 오늘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다른 손녀들은 애교도 많아서 예쁘게 잘 하는데 유독 무뚝뚝해서 예쁜 짓도 많이 못해드려서 죄송해요.
저희가 전주로 이사 온 지 벌써 3년인데 그때부터 아니 그전부터 항상 챙겨주시고 걱정해주시는 그런 사랑 정말 감사하구요. 남들 다른 것 자랑할 때 저희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네 분 모두 건강히 계신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서로 불편하지 않고 편한 친구 같은 사이라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저 결혼 늦게 할 건데 증손자까지 다 보시구요! 사랑해요♡.
FROM, 영인, 대건.
“10년 뒤에는 오늘 초등학교를 졸업한 대건이가 대학교를 졸업합니다. 그 해에도 오늘과 같이 어머님 생신과 졸업식 날이 겹쳐 이보다 더 멋진 축하파티를 할 수 있기를 빕니다.”
큰아들의 건배사가 생각할수록 더 깊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때는 아내의 79회 생일이고 내 나이 여든세 살이 된다.
[2009.2.13.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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