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께서 새로 부임(赴任)하셨다. 첫 강론에서 신부님께서는 시골성당에 계실 때 운동삼아 산에 오르내리셨다고 한다. 산에는 암자가 있어서 스님과 가끔 만나 종교적인 이념은 다르지만, 향이 좋은 차도 함께 마시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하셨다.
스님께서는 만나게 된 인연을 이승을 다할 때까지라고 말씀하셨고, 신부님께서는 세상에 태어나 알게 된 인연은 현세뿐 아니라,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끊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신부님과 우리 교우들은 영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런 북한의 남침으로 육이오사변이 났다. 예고 없이 당한 난리로 온 동네와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큰집 사촌오빠와 우리 둘째오빠 등 동네 고등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였다가 영문도 모르는 전쟁에 끌려가 가방 대신 총을 메고 인민군과 맞서 싸우게 될 학도병이 되었다. 사촌오빠는 종가의 장손으로 홀어머니가 연로하여 학생신분으로 결혼한지 서너 달쯤 되었다. 사촌오빠는 키가 크고 미남형으로 생긴 멋진 오빠였다.
우리 큰오빠와 셋째 오빠와 나는 두 동생과 함께 큰어머니 친정인 시골 '회롱골'
이란 곳으로 피난을 갔다. 큰어머니께서는 새 며느리를 인민군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피난을 보내셨다.
우선 입을 옷과 쌀과 반찬을 가지고 가 옹색한 초가집에서 세 가구가 북적대며 정처없는 생활을 했다. 다행히 한여름이어서 남자들은 동네 모정에서 잠도 자고 하루종일 동네 어른들의 잡담을 들으며, 하루가 여삼추와도 같은 초조한 날들을 보냈다. 올케언니와 나는 밥과 빨래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뒷동산에 올라 우리 동네쪽을 바라보며 부모님과 동생들을 그리워했다.
용산다리를 동강내는 B29젯트기의 굉음소리가 우레소리보다 더 무서웠다. 귀를 막고 무서워 벌벌 떨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새언니는 말수가 없었다. 내가 어리고 시누이라 속마음을 열 수가 없었나 보다. 남편의 사랑이 아직 농익기도 전에 생이별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얼마나 속울음을 울었을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 이미 아이를 임신했었다. 악몽같은 3개월이 지나 9월 28일 수복이 되어 그립던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고향집에서는 매일밤 인민군이 수십 명씩 떼지어 찾아와 밥을 시켜 먹고, 낮에는 공습을 피해 온종일 잠을 자고, 밤에는 남으로 남으로 행군을 했다고 한다. 내 집, 내 양식이지만 총칼 앞에 견딜 자가 어디 있겠는가? 부모님은 숨도 크게 못 쉬는 악몽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휴전이 되어 같이 갔던 학도병 오빠들은 무사히 돌아왔는데 하필이면 큰집 오빠만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그 뒤에 새언니는 딸을 낳고 수절하면서 살았다. 긴 세월동안 외로움
에 지친 그 언니는 이리같은 사내의 농간으로 쌓아 올린 정절의 금자탑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소문은 맞바람이 되어 온 동네를 휘몰아쳤다.
부자집 청상과부의 외도는 온 동네의 화제거리로 충분했다. 언니는 겹겹이 쌓인 울분과 시커멓게 타 들어간 속을 세상을 탓하고, 자신을 비관하였으리라. 쓰라린 속을 누가 위로할 것이며, 그 누가 보상해 준단 말인가.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던 언니가 재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옛날엔 연애를 하면 동네방네 소문 때문에 바깥출입도 못했었다. 지금은 연애를 하지 않으면 결혼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요즘 같으면 아무 흉도 아닌 게 재혼이고 그게 보편화되었는데, 그때는 죄인처럼 닥달
하여 돌팔매질을 하였으니, 음(陰)지에서 양(陽)지로의 시대적 흐름이라 할 수있다. 때를 잘못 만난 오빠 부부는 1년도 함께 살지 못한 비운의 인연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사는 걸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더불어 관계를 맺고 산다. 공동체 안에서 사노라면 좋을 때와 나쁠 때도 있을 것이며, 피치 못할 악연도 있을 것이다.
부모자식간의 천륜(天倫)이 있고, 부부의 끈끈한 연분(緣分)도 있다. 또한 세계가 하나 되어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도록 UN(국제연합)과 OECD(경제협력 개발기구),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 각료회의) 등 많은 동맹을 맺고 있기도 하다.
사람뿐 아니라 우주만물 속에서 살아 있는 온갖 동물들과 식물들도 인간 곁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산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공산품도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들이다. 살다보면 희, 로, 애, 락이 있고 인간사를 엮어 가는 순리도 있기 마련이다.
요즘 너나없이 경제가 어렵고 살기 힘들다고들 한다. 그러나 예전에도 더 어렵고 힘들 때가 있었지만 모두가 잘 이겨내어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생활을 이어 왔다. 노력없이 일확천금을 얻고자 하는 도둑같은 마음은 비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한 파렴치범 강호순 같은 반사회적 성격장애자에게 아무런 이유없이 죽어간 악연만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어려운 역경에서도 윤리와 도덕을 지키면서 법질서를 준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2009.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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