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8월 28일, 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을 때였다. 전주북부경찰서 경무과장으로 있을 때 참모회의가 끝나자마자 큰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화기를 놓고 급히 차를 타고 서신동 제일산부인과로 달려가서 내가 제일 먼저 보았다. 나는 아들 셋을 가졌는데도 왜 그렇게 딸보다 아들을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옛날 사람임에 틀림없다.
아내가 내 흉을 보는 항목 중에는 손녀를 낳았을 때 연락을 받고도 그 다음날에야 산부인과를 찾아간 일이 꼭 들어간다. 손자를 낳았다는 말을 들으면 번개같이 찾아간 것이 또 하나의 칭찬이 아니라 흉이 되어버렸다. 큰며느리에게 좀 미안한 생각은 있었지만 변명을 하지는 않았다. 손자를 얻은 게 훨씬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이름도 경주이씨 42세손 항렬을 따라 내가 지었다. ‘鍵’자는 ‘열쇠건’자다. 큰일을 하는 위대한 인물이 되라고 대건이라고 지었다.
손자가 세 살 무렵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 매를 들고 종아리를 때렸다. 울다가 무서워서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큰아들이 미웠는데 그를 때려주지 못한 화풀이를 손자에게 한 것이다. 종아리를 보니 손가락크기만큼 부어있고 눈이 빨개져 있었다. 그 손자의 외할머니가 보시고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할아버지에게 맞았다고 대답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몹시 속이 상해 속으로 나를 많이 탓하려니 싶었다. 사실은 내 마음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쓰라렸다.
그 뒤로 손자는 나를 무척 무서워한다. 내가 시키는 일은 무조건 복종한다. 제 엄마가 이발을 한 번 시키려면 많은 실랑이를 벌인다. 어느 날 내가 미장원에 데리고 가서 이발을 시키니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미용사가 너 대건이 맞느냐고 해서 웃었다.
목욕하기도 싫어했다. 제 부모가 목욕탕에 데리고 가려면 몇 번씩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가 가자고 하면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따라나선다.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에 살 때 내가 가면 손자 목욕시키는 일은 으레 내 몫이다. 손자와 목욕을 가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손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즐거움 때문이다. 요즘은 목욕탕엘 가면 내 등을 밀어준다. 내가 씻기기만 하다가 나를 씻겨주니 흐뭇하다. 나중에 내가 더 늙었을 때 나를 씻겨주어야 한다고 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하는 모습이 어찌 그리도 의젓한지 모르겠다.
내가 손녀와 손자 네 명 중에 매질을 한 사람은 대건이 뿐이다. 내 말을 잘 듣는 것이 지금도 무서워서 그럴까 생각하니 아픈 마음이 가시지 않고 있다. 내가 그때 내 화풀이를 그런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했지만 손자가 미워서만은 아니었다. 그런 내 실수를 치유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건이가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그때 매질을 했다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은 항상 내가 가진 간절한 소망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나에게 바둑을 배우고 있다. 주말이면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목욕을 하고 바둑을 배우고 간다. 그뿐이 아니다. 판소리 북도 배운다. 북을 제법 잘 쳐서 내가 창을 하면 중머리 중중머리 정도는 무난하게 친다. 흔히들 아들을 기를 때는 바쁘게 사느라고 예쁜 줄도 모르다가 손자야말로 정말 예쁘다고 한다. 그건 사실이다. 무지무지하게 예쁜 게 손자다.
밥상을 받으면 내가 수저를 들어 음식을 먹기 전에는 먹지 않는다. 그 애를 먹게 하려고 내가 먼저 얼른 수저를 든다. 으레 그 애가 먼저 밥을 다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수저를 식탁에 놓지 않고 밥그릇위에다 걸쳐놓고 “할아버지, 제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라고 하고 일어난다. 그렇게 착하고 예쁠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장난감을 조립하기 좋아하더니 과학의 달 기념 로봇조립경연대회에 전주효림초등학교 대표로 출전하여 상을 받았다. 피아노를 배워 경진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다.
나는 7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지 못했다. 부모님이 아들 넷에 딸 다섯을 낳고 나를 낳으셨으니 또 아들을 낳았다고 자랑은 하셨을 테지만 사랑을 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보다 5살 위인 형님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4대(代) 12명의 가족이 한집에서 살았다. 할아버지와 형님은 겸상으로 식사를 하셨다. 큰형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반찬으로 놓은 갈치 한 토막이 늘 남아 나온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자 먹으라고, 형님은 할아버지 잡수시라고 서로 양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 밥은 쌀밥이고 형님 밥은 보리밥이니 쌀밥을 덜어서 형님을 주셨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연을 형님이 신나게 띄우는 것을 나는 강아지처럼 따라다니면서 보았다.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셔 상여가 나가던 날, 하늘에 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그러자 형님은,
“할아버지! 하늘에는 지금 비행기가 날고 있습니다. 저 비행기를 보시는가요?”
라며 슬피 울었던 일은 우리 집안 어른들이 두고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대건이가 장래 위대한 과학자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형님이 할아버지이야기라면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열변을 토하듯, 내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건이를 사랑했던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매질을 했던 내 아린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시려니 싶다.
[2009.1.1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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