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설날풍경이 쓸쓸해진다. 설날마다 세배를 다니며 덕담을 나누던 집들이 하나둘 줄더니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다. 막내 고모님과 막내이모부님이 계시지만 설이나 추석 명절에는 서울이나 따로 사는 큰아들 집으로 가신다. 전주에 사시던 일가친척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시니 몇 해 사이 이렇게 세배갈 곳조차 없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 집에서 내가 세배손님들을 맞을 때가 된 것이다.
옛날에는 설 차례를 빨리 모시고 이 집 저 집 세배를 다니노라면 하루해가 빠듯했었다. 나는 돌아다니며 친척 아이들에게 세뱃돈 주노라 바빴고, 우리 아이들은 세뱃돈 받느라 즐거웠다. 그렇게 흥겨웠던 설날풍경이 어느새 조용하고 쓸쓸한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떠들썩해야 할 설날인데 거실의 텔레비전만이 쉬지 않고 하하호호 웃어댈 뿐이다. 그 텔레비전에게 세뱃돈대신 휴일수당이라도 주어야 할 모양이다.
기축년 설에는 우리 내외와 큰아들내외 그리고 큰손자 동현이까지 다섯 명이 조상님께 차례를 올렸다. 세배를 받으시는 조상님들도 쓸쓸해 하셨을 것이다. 동생네 식구들은 멀리 이사를 가버려서 오지 못했고, 둘째아들네 세 식구는 미국에 살고 있으니 올 수가 없다. 딸네 세 식구는 시댁에서 설을 쇠고 주말에나 세배를 올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들딸 가리지 않고 하나나 둘만 낳으니 훗날 그들의 설날풍경도 오늘의 우리 집 풍경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설날이란 새해의 첫날이란 뜻이다. 설날의 어원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과, 본래 ‘섧다’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새해의 첫날인 정초가 설날이므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섦’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이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설날엔 추석과는 달리 떡국차례(茶禮)를 올린다. 차례상(茶禮床)에 떡국을 제수로 올리기 때문이다. 또 설날에 마시는 술은 ‘세주불온(歲酒不溫)’이라고 하여 찬 술을 한 잔씩 마셨다. 또 설날에는 도소주(屠蘇酒)를 마셨다는데 이 술은 한약재인 육계(肉桂)와 산초, 흰삽주뿌리, 도라지, 방풍 등 여러 약재를 넣어서 만든 술이다. 설날 이 술을 마시면 1년 내내 모든 병이 침노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술이 언제 사라졌는지 나는 아직 그런 술을 한 번도 마셔보지 못했다. 그래서 겨울이면 내가 자주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했던 것일까?
설날에는 액운을 쫓는 풍속도 있다. 그 가운데 ‘야광귀(夜光鬼:앙괭이) 쫓기’라는 게 있다. 앙괭이라는 귀신이 설날 밤에 인가에 내려와서 아이의 신발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리는데, 신을 빼앗긴 아이에게는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귀신이 무서워 모두 신을 감추거나 뒤집어놓은 다음 잠을 잤고, 체를 마루 벽이나 뜰에 걸어두기도 했다. 그러면 이 앙괭이가 체의 구멍을 세느라 아이들의 신발 훔칠 생각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도망간다는 풍속이다. 이러한 풍속은 설날엔 친척 어린이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신발을 잘 정리하도록 하려는 어른들의 지혜가 담긴 풍속이 아니었나 싶다. 또 지난 1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가 설날 저녁에 문밖에서 태우면 그 냄새가 악귀나 나쁜 병을 물리친다는 풍속도 있었다. 이 풍속은 빠진 머리카락이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잘 관리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밖에도 섣달 그믐날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도 했는데 아이들이 참지 못하고 잠들면 아이들 눈썹에 밀가루를 발라서 아이들을 놀려댔다. 이 역시 밤이 늦더라도 어른들이 설 준비를 할 때는 도와드리라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설날 세배를 마치면 끼리끼리 어울려 놀이를 즐겼다. 여인들은 널뛰기나 상륙(象陸:雙六)을 즐겼고, 남자들은 연날리기와 제기차기, 윷놀이, 석전(石戰), 차전놀이, 줄다리기, 지신밟기를 즐겼다.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날까지는 먹을거리도 풍부한 즐거운 축제기간이었다. 우리 겨레 최대의 명절인 설은 한 해를 시작하는 축제로서 이승의 후손들이 저승의 조상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잔칫날이기도 했다. 또 설은 가족과 이웃 간에 정을 쌓고, 몸을 보하며, 겨우내 부족한 운동량을 보충하여 건강을 도모하는 우리 조상의 지혜로 만들어진 큰 명절이다.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바뀌면서 농경사회의 풍습들이 자꾸 변질되고 있어 안타깝다. 농경사회는 붙박이생활[定着生活]이었지만 지금은 떠돌이생활[遊牧生活]이기에 그럴 것이다. 명절이면 고향을 찾는 차량들로 도로가 막혀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민족의 대 이동’이라고 대서특필하지만 그런 현상도 세월이 흐르면 점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떡국을 먹고 나서 아들내외와 손자의 세배를 받았다. 덕담을 건네면서 미리 마련한 세뱃돈을 주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이든지 준다는 것은 받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 받는 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더없이 흐뭇하다.
내가 큰아들 나이 때 나는 이미 3남매나 낳았었는데 손자 동현이가 여섯 살인데도 큰아들내외는 아직 둘째를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훗날 큰아들내외가 내 나이쯤 되면 그들이 맞이할 설날풍경은 오늘같이, 아니 오늘보다 더 쓸쓸할 텐데, 입장을 바꿔 생각할 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왜 이렇게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설날의 해님은 어제의 해님처럼 동녘에서 떠올라 그 걸음걸이 그 발걸음 그대로 서녘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설날인 오늘 아침에 큰며느리가 끓여 준 떡국을 한 그릇 먹었더니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나이도 한 살 더 먹고 말았다. 떡국 속에 나이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수필집 10권, 수필평론집《수필의 맛 수필의 멋》/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등 다수 수상/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역임/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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