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양영아
ㆍ작성일	2010-02-03 (수)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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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배움터
잃어버린 배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양영아

벌써 며칠째 눈이 내리고 있다. 지금 그곳에도 이렇게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가버린 운동장에 하얗게 펼쳐 놓은 눈 이불. 그 끝자락을 살며시 들춰보면 그때 그 아이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내가 근무했던 고산초등학교 수선분교는 통폐합이 된 학교로 지금은 ｢빈첸시오집｣이라는 노인요양소로 문패가 바뀌었다. 수선초등학교는 내게는 잊히지 않는 근무지였다. 이곳은 내가 결혼하여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여 큰아이를 낳았던 곳이며. 두 번째로는 옛정이 그리워 선택했던 벽지학교였다.

고산을 지나 화산 쪽으로 굽이굽이 몇 고개를 넘다보면 고산초등학교 수선분교가 나왔다. 전교생 35명. 국 씨와 유 씨 등이 많아 집성촌이 잔존하고 한 집에서 아이들이 2명, 3명씩 다니기 때문에 가족과 친척들의 모임인 듯 무척 다정스러웠다. 아이들의 도란거림과 웃음소리가 한 소쿠리씩 쏟아지는 그런 곳이었다. 대부분이 영농가족으로 부모들은 아이들보다 먼저 논밭으로 일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애들은 어려서부터 훨씬 어른스러웠다.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시키지도 않은 청소를 잘하는 1학년 꼬마들.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조손가정의 아이들. 그러나 들꽃처럼 여린 아이들만 살고 있는 동네였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은 우리나라 교육계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교육부는 교육재정 측면과 학생 수가 적어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규모학교의 통폐합을 단행했다. 수선분교도 이렇게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이 되어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2009년까지 초등 529개교 중학교 123곳, 고등학교 24곳 등 전국 676개교를 통폐합해야 한단다. 통폐합 실적을 시도교육청 평가에 반영해 재정을 차등 지원하겠다고까지 했다는 것은 지역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강제집행과도 같은 무리한 처사였다. 농어촌학교는 단순히 공부만 하는 교육기관이 아니다. 농어촌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자 정신적 중심 시설이었다. 마을의 중심에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겐 안심이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즐겁게 일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학교행사가 있는 날은 마을의 큰 잔칫날이기도 했다. 이런 학교를 없앤다는 것은 실향민처럼 마음 시리게 하는 일이며 농어촌의 황폐화를 가속화시키는 일이다. 버스로 장거리 통학을 시켜야 한다는 불안감은 농어민에게 귀농현상보다 이농만 불러일으키는 불행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한쪽 발 인대가 늘어나 깁스를 했었다. 왼쪽 발이었기 망정이지 출근도 못했으면 어쩔 뻔 했나? 1학년이 7명, 2학년이 1명. 복식수업이었는데 두 학년이 공치는 날이 되지 않았을까? 1학년 귀염둥이 국창환이 물었다. “선생님, 실내화 새로 샀네요. 한 짝만 샀어요?” “아니, 두 짝.” “뭐 하러 두 짝이나 샀어요? 한 짝만 신으면 되잖아요.” “너, 선생님 다리 낫지 말라고?” “아, 그렇구나. 나으면 두 짝 다 신어야지!”

파란 하늘에 노란 은행잎들이 점점이 박혀있던 그 가을. 진한 엑기스 햇살을 감아 온 몸을 통실통실 부풀리더니 제 몸 하나 주체할 길 없어 끝내 우수수 가지를 놓치고야 만 누런 구슬들. 한 아름도 더 되는 은행나무 아래 세월엔 장사 없다며 나뒹굴고 있었다.
황옥구슬의 반가운 작은 발자국 소리들이 주변에 가득 차더니 하얀 은행열매를 발라내어 수돗가로 달려갔다. 팔뚝까지 걷어 올린 작은 손들이 오독오독 은행 알을 문질러 건져냈다. 깨끗이 목욕한 은행들이 반질반질 햇빛에 반짝였다. ‘요놈들 내 맛 좀 봐라. 너희들이라고 옻에 강할쏘냐. 자연과 친하게 지낸다고 날 얕잡아보면 안되지.’ 은행나무가 독을 품었나보다. 한 아이가 옻이 올라 병원엘 다녔단다. 나중에야 통원치료 소식을 듣고 어찌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단풍이 온 산을 물들이기 시작하면 가을 산속은 푸짐한 간식창고로서 어린 아이들을 손짓했다. 바쁜 엄마가 간식을 챙겨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감도 따먹고 알밤도 주워 먹었다. 논두렁 가에 서있는 대추나무에서 수줍은 아가씨의 빨간 얼굴처럼 곱게 물든 대추 맛도 볼 수 있었다.

덩치 큰 5학년 학생 여섯 명이 때론 말썽도 피웠지만 이곳 수선의 물이 맑아서 아무리 짓궂게 굴어도 오염될 물이 없었다. 담가봤댔자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뿐 흙탕물은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미운 오리 새끼라도 독성을 지닌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애늙은이처럼 선들선들 바람이 부는 것이 비가 올 것 같다면서 불어오는 바람의 눈치도 잘 살폈다. 벼이삭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면 시집가는 색시를 데려오듯이 어린 농군도 한 몫을 했었다. 12살 어린 나이에 아빠의 안내대로 조심조심 트랙터의 핸들을 돌리며 나락타작을 했었다. 통합된 읍내 본교에서 잘들 견뎠는지 못내 걱정스러웠다.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이면 학교와 마을은 잔치를 벌였다. 가을 현장학습을 학부모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날짜와 행선지는 학부모와 상의해서 잡았다. 관광버스 두 대로 갔었다. 버스 한 대는 학부형들만 타고 가면서 그 간의 모든 스트레스를 확 날려 버리는 대 이벤트로 하루를 즐겼다. 변산으로 격포로 돌아오며 엄마들이 펄펄 끓는 찜통 속에서 살짝 데쳐주는 주꾸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알싸한 공기 비늘이 떨어졌다. 싸한 냉기가 겨울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 주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숙직실 벽면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아이들 서너 명도 옹기종기 햇볕에 찰싹 달라 붙어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햇살은 옛날이나 마찬가지로 놀러 왔는데 아이들이 없다. 읍내학교로 모두 통합되어 버린 탓이다. 함께 지냈던 바람과 햇빛과 시냇물을 차창 밖으로 훔쳐보면서 읍내학교로 등교했던 아이들은 그 등교 길이 행복했을까? 기죽지 않고 잘들 지냈을까? 산속의 그 많던 간식은 언제 먹었을까?

대안학교나 농어촌개발센터로 거듭난 폐교는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러나 이미 통폐합되어 빈터로 남아 있는 많은 폐교들이 아직도 쓸쓸하게 옛 주인을 그리워하며 그대로 서있다. 다른 곳도 하루 빨리 부활하여 이전의 귀여운 아이들을 대신하여 많은 사람들을 포근히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수선분교에 세워진 가톨릭센터의 ｢빈첸시오집｣ 노인요양소에도 항상 주님의 은총과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