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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박인경
ㆍ작성일	2010-01-30 (토)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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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을 마시며
술 한 잔을 마시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박 인 경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바(Bar)에 앉았다. 작은 잔에 담긴 연갈색 액체를 마신다. 달콤 쌉싸름한 맛의 술 한 잔이 타는 듯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밖은 깜깜한 밤이다. 몇 차례 남편과 와 보았던 곳을 혼자서 찾아왔다. 오늘은 그가 집에 없는 날이다. 전주에 둥지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날 함께 회포를 풀 친구가 아직은 없다. 심심하기도 하고 밤의 풍경도 구경할 겸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색으로 칠해진 문을 열자 갸름한 미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를 알아보고는 약간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여자 혼자 술집을 찾는 일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쑥스러운 마음에 구석진 자리에 앉아 남편과 함께 마시다 보관해 놓은 양주를 주문했다. 준비를 마친 마담은 앞에 앉아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나로서는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는 처음이다.

탁자위에는 양주 한 병과 얼음, 과일안주, 캔에 담긴 차음료, 생수 등이 놓여 있다. 대개 양주는 생수를 섞어 마시기도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 순수한 것이 좋아 원액을 그대로 마시는 걸 즐긴다. 그 다음에 얼음을 넣은 생수를 희석하는 의미로 마시곤 한다. 이런 말을 하면 꽤나 술을 잘 마시는 것 같으나 나의 주량은 딱 석 잔이다. 더 이상 마시면 현기증과 구토증이 생겨 조심한다.

다른 술과는 달리 양주에게서는 왠지 고독의 냄새가 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이 홀로 양주 한 잔을 쓸쓸히 들이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007영화에서다.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칵테일의 일종인 '마티니'를 즐겨 마신다. 그는 말쑥하게 차려 입고 늘 카운터에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칵테일을 젓지 말고 흔들어 달라는 농담 한마디를 곁들이며. 왠지 그 모습에서는 정형화된 고독이 엿보인다.

술은 언제부터 인류와 함께 했을까? 아주 오래 전에 과일이나 곡식이 땅에 떨어져 낙엽이 쌓이고 공기가 차단되어 자연적으로 발효가 된 액체를 우연히 사람이 맛보게 되면서 술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학설은 인간이 음식을 저장해 놓는 과정에서 당분이 많이 함유된 과실류가 용기 속에서 발효되었고, 이 신비한 액체에 우리가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한 잔을 비우고 마담에게 한 잔을 건넸다. 매우 익숙한 듯 그녀는 단숨에 잔을 비워 버렸다. 몇 잔이 오가니 그녀도 취한 것 같았다.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 사이인 것처럼 마음을 열었다. 술이란 묘한 것이다. 조금씩 취하게 되면서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비밀을 하나씩 털어 놓게 되어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된다.

그녀의 나이는 사십대 중반이었다. 오랜 동안 영업 계통의 일을 하다가 나이를 먹어도 할 수 있는 술집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연륜이 생긴 후 시작한 일이라 손님들을 잘 포용하고 있었다. 단골손님이 즐겨 듣는 음악을 틀어 주거나, 배가 고픈 사람에게 라면을 끓여 주는 수완도 부려 나름대로 운영을 잘하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천하게 생각했던 편견이 조금은 사라졌다. 남자들은 낮동안 업무에 따른 긴장감과 힘들었던 기억들을 잊고 싶을 때 주로 술을 마시는 것 같다. 누구에게 속 시원히 터놓고 할 수 없는 이야기나 부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술집 마담을 상대로 넋두리하듯 토해내리라. 그녀는 간간히 혼자 온 남자들의 말상대를 해 주고 있었다.

이 직업의 어려움은 술을 마셔야 한다는 점이다. 손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히 과음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몸에도 이상을 느낀다고 한다. 마담은 항상 손님들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들어 주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말해 보기는 처음이라며 그동안 쌓인 울혈이 풀린다며 웃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편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이는 술을 제법 즐기는 편이다. 술에 취하게 되면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데 취중에 하는 말들은 진심어린 사연들이다. 자주 듣다 보면 싫증도 나고 취해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싫어만 했지 나는 그녀처럼 얼마나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나 뒤돌아보게 되었다. 가끔 그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게 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취기어린 얼굴에도 피곤이 내려앉았다. 애잔한 마음이 들어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서 바를 나섰다.

(201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