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처럼 겨울비가 내린다. 아니 처음 내리는 겨울비다. 잔설이 녹아내리고 겨우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지저분한 것들이 쓸어 나가고 있다. 덕분에 세차를 해야 할 내 차도 먼지를 털고 있다. 잘됐다 싶어 마음먹고 사무실과 책상서랍을 정리하기로 했다. 지난 연말부터 묵은 것들을 정리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차일 피일 미루다 오늘까지 왔다. 이번에는 중요한 것만 남기고 버릴 것은 모두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서랍을 열어보니 사람의 세상만큼이나 서랍속의 세상도 복잡했다. 서랍 위 칸은 수첩과 명함철, 계산기, 약통, 그리고 아무렇게나 넣어둔 서류와 나중에 보려고 보관해둔 자료들, 다음 칸은 치약 칫솔은 물론이고 손톱깎이와 면도기, 빗, 은행통장, 차마 집으로 가져갈 수 없던 사진들, 맨 아래는 동창회서류와 전화번호부, CD, 기능식품, 화장품, 하물며 컵라면까지 온통 뒤죽박죽이다. 둘 것과 버릴 것을 일일이 가렸다. 이곳에 넣을 때는 필요할 때 쓸 요량으로 넣어뒀지만 시간이 지나니 쓸모없는 것들도 많았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버리고 왔어야할 것도 있고, 사회에 나가면 이런 것은 꼭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수첩과 참고자료들, 명함철, 집으로 가져가지 못한 기념품들, 그 중에는 중국방문단으로부터 받은 선물도 있었다. 하나하나에 의미를 주면서 서랍을 정리했다. 명함철을 정리할 때는 나와 연을 맺었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가수와 매니저들의 모습, 섬으로 여행을 갔다 하룻밤을 묵었던 민박집 아주머니의 얼굴, 강원도 속초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사람들, 가볼만한 음식점들의 이름, 세상에서 최고의 자산은 친절과 정직이라는 것을 무언으로 가르쳐 주신 직장의 선배님들! 모두가 나의 소중한 동반자들이었다.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정말로 좋으련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명함들을 버렸다. 버렸다가 다시 집어넣고 넣었던 것 다시 빼서 버리고, 인연의 끈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책장을 정리할 때는 시간이 더 걸렸다. 행사장이나 세미나에 참가했다가 가지고온 팸플릿과 책자들, 그 중에서 가장 아까운 것은 역시 지인들이 보내준 책들이다. 시간 있을 때 꼭 읽어봐야겠다고 책장 한 쪽에 꽂아둔 것들이다. 6개월 안에 읽지 않는 책은 쓰레기로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니 아깝다. 특히 작가가 직접 내 이름까지 적어서 보내준 책인데, 버리려니 작가에게 너무나 죄스럽고 다시 만나 뵐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몇 장이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그 분들의 마음을 읽었다. 이제 내 손을 떠나면 다시는 오지 못할 슬픈 이별이다. 우리네 삶도 인연의 고리가 이어지면 소중한 동반자가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슬픈 버림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까?
서랍과 책장이 말끔해졌다. 시원하기도 하지만 버릴 것들을 바라보니 섭섭하기도 하다. 살다보면 버려야 얻는 이치도 있지 않은가! 손에 든 물건을 버려야 다른 물건을 다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추억까지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물건 하나 명함 하나하나에 주어진 존재의 의미와 기억들을 결코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내 가슴속의 서랍은 정리하지 못했다.
어느덧 하루해가 갔다. 말끔히 정돈된 책장과 서랍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후련하다. 저 빈 자리에 어떤 물건들이 다시 채워질까? 아름다운 인연으로 내 가까운 곳으로 찾아올 소중한 인연의 끈을 기대해 본다. 이제는 덕진 연못 주변에서 서성이는 봄이 찾아와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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