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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행촌' 에세이모음
작성자 김학
작성일 2009-09-20 (일) 14:49
ㆍ추천: 0  ㆍ조회: 2725      
우리 집의 정권교체
우리 집의 정권교체
                                                             김 학

우리 집에도 정권교체 바람이 불었다. 내가 장기 집권해온 '가장(家長)'이란 옥좌를 물려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오랜 세월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며, 자녀들을 기르고 가르치노라 힘써왔다. 내 나이 이순(耳順)의 고개를 넘어선지 7년! 이제 온갖 세상 잡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때다.
돌이켜보면 나는 여덟 살에 '가장'이란 옥좌에 올랐다. 무려 78년을 집권한 고구려 장수왕보다는 짧지만 나도 반 백 년이 넘도록 장기 집권을 한 셈이다. 서른하나의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나신 아버지는 가장이란 옥좌에 오르지도 못하셨다. 그러니 나는 조선시대 정조 대왕처럼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로 옥좌에 올랐다. 나는 어머니의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어렵사리 가정을 이끌면서 대학까지 마쳤다. 제대 후 직장에 나가면서부터는 내가 받은 월급으로 가정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다달이 살림살이가 불어나고 집안 형편이 나아지면서 집안엔 훈기가 돌았다.

언제부턴가 5년마다 12월이면 대통령선거를 치른다. 여야는 저마다 대통령후보 경선을 치르느라 나라가 들썩들썩하다. 대통령후보를 뽑는 일이 체육관을 벗어나 전국 시․도를 순회하며 치러지고, 당원은 물론 일반 국민이 직접 참여하게 되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5년마다 치러지는 12월 대통령선거 때 어느 당의 어느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을 깨우는데 여야 대통령후보 지역순회 경선이 크게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 집에서의 '가장' 선출은 가족의 투표로 결정되지 않는다. 왕조시대의 임금자리가 자연스레 큰아들에게 물려지듯이 우리 집의 '가장'자리도 큰아들에게 넘겨주면 된다. 대통령 이․취임식처럼 번잡스런 요식 절차도 필요가 없다. 그러니 2남 1녀의 아이들이 저마다 가족을 대상으로 득표활동을 펼칠 이유도 없다.

며칠 전 큰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한 통씩 보내달라는 주문이었다. 전국의 어느 곳이던지 가까운 동사무소에 가서 신청하면 그런 민원서류를 발급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녀석은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가족의 건강보험증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정년퇴직을 하니 건강보험이 문제였다. 지역보험에 신고를 했더니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세 자녀는 따로 건강보험증이 발급되고, 보험료도 별도로 부과되었다. 전주에 사는 식구와 서울에 사는 식구가 따로따로 지역보험에 가입해야 했다. 보험료는 직장보험 때보다 배 이상 높게 부과되었다. 백수가 된 처지에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차 마침 큰아들이 취직을 하게 되고, 큰아들 덕에 직장건강보험증이 발급되기에 이른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직장에 나갈 때까지는 모든 식구가 내 우산 속에 있었는데 이제 그 식구들이 큰아들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요즘엔 한 가정의 '가장권'(家長權)은 건강보험증이 누구의 이름으로 발급되느냐에 달린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의 정권교체는 마침내 이루어진 셈이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신임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을 깔아뭉개는 일들이 많았다. 잘한 업적은 묻어두고 잘못한 일만을 들추어내서 존경의 모자를 벗기기에 급급했다. 5년 후에 나타날 자신의 후임자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은 듯 안하무인격이었다. 자기는 평생 대통령이란 금불상(金佛像)을 등에 지고 살 줄 아는 모양이다. 이솝우화의 어리석은 당나귀를 생각나게 하는 현상이다.

내가 비록 '가장'이란 가통(家統)을 큰아들에게 물려준다 해도 그런 불행한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나 승어부(勝於父) 즉 자기 아들이 아비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던가?
가정을 확대하면 국가가 되고, 국가를 축소하면 가정이 되는 것인데 왜 정치가들은 그걸 모르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권좌만을 탐내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 집의 정권교체는 끝났다. 하하호호 웃으며 축복 속에 옥좌를 넘겨주었다. 정권을 물려준 나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권을 물려받은 큰아들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통령 꿈을 가진 이들이라면 모름지기 우리 집의 정권교체를 본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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