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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형효순
ㆍ작성일	2009-09-09 (수)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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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세월
천년 세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수막새의 미소가 오묘하다. 어디선가 봄직한 미소,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그 미소는 내가 이 땅의 후손임을 상기시켜 준다. 고속도로입구에서 경주로 들어서는 도로에서 맨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한쪽 귀와 입 근처에서부터 턱밑이 잘려나간 수막새의 얼굴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춘향골과 다름없이 바람이 불고 햇빛이 눈부셨다. 땅도 다를 바가 없건만 한 나라의 역사가 천년의 세월이었다니 나무 한 그루 바위 한 점, 어디가 다를까? 의미를 새기려는 내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들판에서 돌탑 두 개가 묵직한 모습으로 서서 두 번째 인사를 건넨다.
천년의 세월을 마주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삼층탑을 쓰다듬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천년을 기다렸다고 속삭였다. 오래전부터 와보고 싶었노라고 나도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감동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당당했던 석탑은 천년의 무게를 버티고 찬란했던 역사를 말없이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약간의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핼쑥해 보였다.
신라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켜주었고, 그 아들 신문왕은 용이 된 부왕을 위해 감은사 금당 밑에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을 만들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용혈까지 만들었다. 오늘 바라본 용혈은 아주 작은 물꼬에 불과하지만 문무왕의 나라걱정이 오늘까지 이어져 있으니 이 나라와 백성이 어찌 평온하지 않을 것인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아버지는 ‘옛날 옛날에 그러니까 한 천년이 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로 시작하셨다. 그러면 그 천년은 내게 엄청난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몸을 바싹 조이게 했다. 감은사지(感恩寺址)를 뒤로 하고 내려오면서 석탑과 그 주위를 둘러보니 밭에서 일을 하는 농부와 골목으로 돌아드는 두 아낙네들 모습이 그림처럼 보였다. 천년 후에 우리는 후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오래 보관될 수 있는 각종 기술이 있을 터이니 그리 궁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 돌탑 아래 모여서 이야기를 하며 살았을 천 년 전 조상들과 내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애틋하지는 않다. 그러나 앞으로 천년 후에도 우리의 후손과 마주하기를 기대하면서 석탑을 바라보니 돌이라서 외롭지 않고 그때까지도 괜찮다고 했다.
선덕여왕 12년에 세웠다는 기림사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인기리에 방송중인 드라마 ‘선덕여왕’의 숨결을 좀 더 가까이 느껴보았을 뿐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천명과 덕만 그리고 서동요의 선화, 세 공주 가운데 역사상 처음으로 여왕이 된 덕만 공주는 쌍둥이도 아니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한 미실과 선덕여왕의 권력다툼은 서로 대립할 수 없는 시대적 차이가 날뿐더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미실이라는 이름은 없다고 한다. 다만 극중에 여자로서 지략과 담력이 뛰어나고 남자를 여럿 거느려 성이 다른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백성을 휘어잡는 책략 또한 뛰어났으니 같은 여자로서 통쾌한 일면이 있다. 비담도 미실의 자식이 아닌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인물이며, 최고의 자리인 상대등까지 오른 실존인물로 선덕여왕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진압을 당했다고 한다. 아무튼 기록이 정확하지 않는 천 년 전의 인물을 상세히 알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신라의 문화는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고 백성들 또한 불심이 대단했다. 세 번째 찾은 골굴사(骨屈寺)에는 거대한 마애여래좌상이 있었다. 문무대왕을 바라보고 있다는 마애여래좌상은 화강암에 새겨서 보존상태가 썩 좋지 않았고 오랜 풍화작용으로 훼손이 심해 유리지붕을 씌워 놓아 올라가지 않으면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왔을까? 이제는 부드러운 미소만 간직한 채 위험한 바윗길 사이로 찾아 올라가 좋은 글 한 편 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빌어도 입가에 빙긋이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내가 사는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인 보물 제423호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육계가 높은 민머리에 귀는 짧고 둥글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눈·코·입은 생기가 넘치고 근엄하다. 어깨는 매우 넓고 가슴이 발달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볼록하여 다소 어색하지만, 팔과 다리 등 생동감이 넘친다. 가끔 그곳을 찾는 지인들과 자주 올라가는 편이다.
마애불은 서민들의 소원을 빌기에 그만이다. 따로 불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장소이다 그러보니 수많은 백성들의 소원을 듣느라 아주 고달프겠지만 그 넉넉한 미소는 천년을 하루같이 변함이 없다.
천년은 이미 숫자가 아니다. 남편은 요즘 핸드폰음악에 ‘천년을 빌려준다면’이라는 곡을 넣어가지고 다닌다. 만약에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준다면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는 내용을 지닌 이 노랫말처럼 나를 사랑할 자신이 있을까? 한 남자에게 천년동안이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쁨이 아니라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을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