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산악회! 푸른 산처럼 항상 젊고 건강하게 살자는 소망을 담아 정한 이름이다. 그러니까 약 20년 전 1991년 9월 넷째 일요일에 12명이 첫 산행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등산모임이다.
세월 따라 조직의 구성원과 숫자도 변했고, 산행 날짜도 셋째 일요일로 변경되긴 했어도 초기에는 의욕과 패기가 넘쳐 해 뜨기가 무섭게 출발했고, 등산로를 잃으면 당황하거나 불평 한마디 없이 흩어져서 등산로를 찾거나 새로운 길을 내며 정상을 향하기도 하였다. 헐떡이며 겨우 정상에 올라와서도 “벌써 다 왔냐? 너무 가깝다.”
“내려갔다 다시 와야 겠다.”
이렇게 호기를 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귀가 시간도 밤 10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는데, 그땐 정상에선 가볍게 한두 잔을 마시고, 하산주는 2, 3차까지 꼭 챙겨야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산행 때에는 각자 자신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찌게 당번을 윤번제로 정하여 반찬 겸 안주로 요리를 해 먹었지만, 산림보호를 위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찌게 당번이 폐지되었는데, 이는 화기애애한 산악회의 분위기를 저해한 점에서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등산의 묘미는 정상을 밟는 기쁨도 크지만, 그보다는 점심시간의 먹는 즐거움이 아닌가 한다. 각자가 펼쳐 놓은 10여 가지의 반찬은 한식당이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으로 기다린 보람을 만끽하게 된다.
2월의 정기총회 땐 각자가 가고 싶은 산 2곳을 정해서 제출하고, 이를 중심으로 월별 산행 장소를 정하였다. 때로는 초행길에서 갈림길이 나타나면 다수결로 진로를 선택하기도 하고, 길이 막혀 되돌아 온 적도 많았지만 스스로 민주적이다, 아마추어라는 이름으로 자위한 적도 있었다.
산길을 걸으며 직장 이야기도 하고, 가정사나, 인물평가도, 정치, 경제, 사회 등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며 우정을 쌓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도 지루한 줄 모르며 지내고 있다. 가끔은 학습시간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음담패설’로 특별한 소질이 있는 회원이 준비하였고, 이를 경청하는 회원들은 배꼽을 쥐고 웃었으며, 중요한 대목은 밑줄대신 되풀이 설명을 요청하기도 하고, 그 내용을 다시 써 먹으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산행일이 되면 날씨에 관계없이 만났고, 궂은 날엔 산행 대신 이곳저곳 관광을 하였는데, 그것은 그것대로 즐거웠다.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고 했던가! 젊고 건강하게 살자던 푸른산악회, 그 산악회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4,5년 전부터이다. 정상을 향해 일사분란하게 땀을 흘리며 오르고 있을 무렵 누군가
“아이고 힘들어, 나는 여기서 쉴 테니, 다들 갔다 와!”
이런 말을 남기고 그 자리에 앉는 회원이 나타났다. 그 뒤 해가 바뀜에 따라 이런 말을 되뇌는 회원이 늘어나고, 급기야 목표지점의 절반도 채 못 갔는데 “나는 여기까지만 가야겠어, 힘들어 더 이상은 도저히 못가겠어!”
라는 회원이 늘어가니까, 가장 젊은 회원 왈,
“푸른산악회를 관광유람단으로 바꿉시다!”
라는 안타까움 반, 조롱 반의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아예 출발 전부터
“나는 오늘 ○ ○ 까지만 가야겠어, 몸이 안 좋아서.”
라는 말로 미리 자신의 상태를 알려 동의를 구하려는 회원이 나타나기도 한다.
등산 초기에는 버스로 다녔고, 새벽에 출발했으며, 밤 10시 안에 집에 가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던 푸른산악회, 멀더라도 안 가본 산을 가야 한다고 우겨댔고, 전라도는 너무 좁다고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설악산, 제주도 한라산으로 내 달렸으며, 지친 가운데서도 음담패설에 귀를 쫑긋 세우고 배꼽을 잡던 회원들이었다. 그들이 지금은 자가용을 몰 정도로 교통편도 좋아졌고, 경제적 여유도 생겼건만, 좋은 길과 가까운 길, 낮은 산을 찾고, 간 곳을 또 가면 어떠냐 하며, 유명강사의 진한 음담패설에도 달관한 듯 얼쩍지근한 미소로 반응하는 회원들이 되었다. 또 산행 중 도중하차가 잦아지는 걸 보면, 갈수록 산악회의 특성은 약화되고 관광유람단의 특성이 강해지고 있다.
흘러간 20년 세월 속에 서로 정도 두터워져 이웃사촌이 되고, 해외여행을 두 차례나 할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누구하나 흐르는 세월을 붙잡을 사람은 없다. 그 사이 40대는 60대로, 50대는 70대가 되었지만, 나이를 더할수록 고통과 기쁨을 함께하는 산악회가 되고,
“여기까지만 가야겠어, 힘들어 더 이상은 못가겠어.”
라는 말을 적게 쓰는 회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 회원들 모두 건강하여 푸른산악회의 초심을 잃지 않고 호연지기를 과시하는 젊음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혹 변질되더라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멋쟁이관광유람단」으로 아름답게 변질되면 좋겠다.
하지만 신이시여! 우리를 관광유람단이 아닌 푸른산악회 회원으로 영원히 남을 수 있게 회춘의 기회를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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