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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행촌' 에세이모음
작성자 이의
작성일 2009-02-24 (화) 03:28
ㆍ추천: 0  ㆍ조회: 2067      
큰 별이 지다(2)
큰  별이 떨어지다(2)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의



큰 별이 떨어지던 날, 날씨조차 싸늘해 우리들을 더 움츠러들게 했다. 저녁 준비로 한참 분주한데 라디오에서 흐르던 음악이 멎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는 긴급 뉴스가 나왔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회복되기를 기도했는데 기어이 가셨다. 그냥 그분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안이 됐는데! 그리고 요즘 같이 세상이 어지럽고 세상이 혼란을 겪을 때 그 분이 좀 더 건재하시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5년 전 견진성사 단체 사진을 찍었을 때가 생각났다. 천호성당 앞 넓은 계단에 늘어선 견진성사자들 가운데 앉아계신 추기경님 왼쪽에 바짝 앉아 의기양양하던 내가 떠오른다. 그날 운 좋게 그 자리를 잡아 얼마나 감격했었던가! 천지를 품은 것처럼 한 없이 평안하게 웃던 모습은 영락없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의 웃음이었다.  
그의 조부 김보현(요한)은 1868년 무진 박해 때 순교하신 뿌리 깊은 가톨릭 집안으로 독실한 신자인 아버지 김영석(요셉)과 어머니 서중화(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장사꾼이 되고 싶었는데 신부가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청전벽력이었다고 회고록에 쓰고 있다. 대구에 있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기숙사에 있을 때는 신앙심보다는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신학교 규정상 개인 돈을 가질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1전 짜리 동전을 눈에 띄는 자리에 놓아 신학교에서 쫓겨나기를 바랐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서울 동성학교 시절에는 공부가 싫어 꾀병을 부려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추기경은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발목을 놓아주시지 않을 걸 보면 성직자의 길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다른 성직자와는 달리 김 추기경은 어머니의 애틋한 정을 숨김없이 토로한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내 어머니는 가장 크고 특별한 존재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하고, 이 막내아들을 위해서라면 열 번 백 번이라도 목숨을 내 놓으셨을 분이다.”
성직자로서는 드물게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 분이다.
추기경은 일본 유학시절 학병으로 끌려갔는데 전쟁터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 와 사제의 길을 걷는 것도 모두가 어머니의 기도덕이라고 말한다.

1951년 9·15 전쟁 속에서 사제서품을 받는 날의 기도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골의 사제였던 그가 1968년 5월 서울 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천지개벽이 될 만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주교 서품 후 2년 만이었다. 다음해인 1969년 로마 교황청은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47세의 김수환은 가장 젊은 추기경이 되었다.  
1970, 80년대 젊은 추기경의 목소리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의 슬픔과 고뇌가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
이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을 매일 같이 되뇌며 버텨야 했다. 그 버팀은 5공화국과 6월 항쟁을 거치면서도 계속되었다. 1990년 들어 추기경의 목소리는 온유해져 갔다. 말년의 추기경은 화합과 용서를 부쩍 강조하셨다.
가톨릭에 수장이셨던 그분은 교회에 겸손을 강조하시고, 사회 안으로 들어가 직접 찾아가는 사도직을 실천하도록 함으로써 교회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끌어 이로써 교회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지금의 명동성당은 민주성지가 되어 공권력도 침범할 수 없었다. 그 전의 성당은 걸인 잡배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추기경이 대교구장 시절 성당을 찾아드는 모든 이를 품에 끌어안으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신부님들 중 더러는 김 추기경에게 대들며 핍박을 해도 권한을 휘두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그 위치에서 얼마나 감사하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말씀으로 그들을 달래셨다고 한다. 그만한 큰 사랑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분은 전에도 후에도 없을 것이다.

가난하고, 억울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손을 잡아주시던 그분의 사랑에 감사와 그리움의 기사가 신문지상을 덮고 있다.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 추위도 무릅쓰고 전국에서 모인 추모인파가 4일 동안 명동성당을 3번 감아 명동역까지 매일 이어져 40만의 인파가 조문을 다녀갔다는 보도다.
이러한 조문 행렬의 사회적 의미는 추기경의 사랑과 용서와 통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요즈음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을 방불케 하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고, 자고나면 경제가 어렵고 힘들다고 신문이 소리치는 이때 성인 같이 살다 가신 그분의 한없는 사랑이 더욱 아쉽다.
한일 월드컵 때 일치된 함성, IMF 때는 금 모으기 운동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고, 태안 기름 유출 시에는 국민이 똘똘 뭉쳐 저력을 보여주던 힘이 되살아난 듯하다.

1998년 76세로 서울대교구장에서 퇴임하시며 남긴 바람은 ‘운전면허를 따서 삼천리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셨다. 교구에서 지급되는 것 외에는 사적으로는 물건을 거의 구입하지 않으셨다. 그리곤 은퇴 생활비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유품으론 손때 묻은 몇 가지 필수품과 약간의 책뿐이었다. 공수래공수거였으니 그분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가시는 데 깃털처럼 가벼웠으리라.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이면서도 고루하지 않고 유머와 지혜를 가지신 분이다.
김 추기경님은 노래를 잘 못하신다지만 해야 할 자리에서는 언제든지 노래를 부르셨다. 그런데 언제나 상황에 딱 어울리는 노래를 선곡하여 사람들은 놀라게 하셨다. 물론 선곡위원장이 도와주지만 본인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밤 새워 가사를 외우고 노래연습을 하셨다. 그때 분위기에 맞춰 노래하는 노력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포용력이다. 즐겨 부르던 노래는 ‘애모’, ‘만남’, ‘사랑으로’였다.
신부 서품식이 끝나고 새 신부의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사항을 소개하는 때였다.
“이 신부님은 어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라고 인쇄물을 보고 소개하다보니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성이 새 신부의 어머니와 함께 서 있었다. 무엇인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새 신부의 삼촌이세요?”
하고 물으니
“아버지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신자석이나 제대나 긴장감이 돌았다. 그때 추기경께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서품식이 너무 기뻐서 부활하여 오셨습니다.”
라고 대답하시는 바람에 모두가 박수를 치며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추기경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인들이 꽤 있었다. 그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하시는 모습은 보기가 좋았다. 어느 날 함께 식사를 하던 한 신부가 물었다.
“추기경님께선 몇 개의 외국어를 하십니까?”
하고 여쭈어 보니, 대답하시길
“난 두 개의 언어를 잘 하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맞추어 보시오.”
라고 하셨다. 함께 식사를 하던 국장 신부들이 저마다 대답을 했다. 어느 신부는 독일 유학을 했으니 독일어, 한국어 또는 일제 강점기를 사셨으니 일본어, 우리말을 잘하실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틀렸다면서 웃으며 하시는 말씀이
“나는 두 가지 말을 잘 하는데 하나는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참말이야!”
라고 대답하셨다. 모두가 공감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명답이었다.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가슴아파하시고 독재자와 맞서 싸우시던 김수환 추기경은 가셨다. 추기경은 병상에서 못 다한 사랑을 아쉬워하셨다.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습니다. 좀 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했었는데…….”
추기경은 눈을 감으신 뒤까지도 당신의 눈을 내주어 두 사람이 다시 빛을 찾도록 사람에 대한 사랑을 하셨다. 그분의 마지막 말씀도 역시 ‘사랑에 대한 감사’와 ‘사랑하라’였다.
“세상에서 사랑을 많이 받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남은 우리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아 모두가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갈 때만이 평화가 올 것이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닮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시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2009.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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