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병규
ㆍ작성일	2009-09-29 (화) 19:26

ㆍ추천: 0 ㆍ조회: 2816

추억의 병사일지
추억의 병상일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김병규

초주검이 되어 실려 간 병원에서 내 발로 걸어 나왔다.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나는 지금 통원치료를 하고 있다. 50여 일 간 많은 고초를 당했지만 이 상태라도 회복의 문을 열어준 병원에 고마움을 느낀다. 지금도 정신은 말짱하지만 몸은 쇠뭉치를 짊어진 듯 무겁다. 조금만 앉아있어도 허리에 통증이 오고, 서있을 때도 간헐적으로 통증이 온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펴고 반듯이 누워있는 게 제일 편하다. “봉합(縫合)한 척추를 치료하려면 허리놀림을 자제하고 안정을 취하라.”는 주치의의 소견이 옳은 것 같다. 나는 시방 통원치료를 받고 와서 빈방에 홀로 누워있다.

병원생활 50여일!
척추를 둘러싸고 있는 신경은 신체의 어느 부위보다 예민하다고 한다. 교통사고로 골절된 척추가 신경을 물고 있어 통증이 심할 거라 했다. 얼마나 아프면 명줄이 끊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 터지는 신음소리를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수술을 받고 3주 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고통이 심했다.

내가 누워있던 203호 병실은 아주 열악한 조건이었다. 병원의 30개 병실 중 가장 취약한 병실이었다. 좁디좁은 병실에 병상 여섯 개가 놓여있을 뿐 간병인의 자리는 아주 협소했다. 아내는 그 열악한 환경에서 50일을 버티면서 나를 간병했다. 앉아서 날밤을 새거나 오그리고 누워 자는 모습을 볼 때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힘겨운 아내를 무시하고 통증만을 호소할 때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간병인의 고통이 환자의 고통보다 심하리라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아내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그 사이에서도 아내는 때때로 환자의 회복에 좋다는 간식거리를 챙겼다. 토마토를 썰어서 설탕에 버무려오거나 수박이나 옥수수, 포도와 삶은 고구마를 챙겨 왔다. 간식은 여섯 환자들에게 골고루 배분되었다. 옥수수나 포도, 고구마와 사과 등은 분배가 쉬워도 토마토나 수박은 일일이 그릇을 챙겨야 하니 불편했다. 아내는 꼭꼭 챙기는 정성을 보였다. 아내 뿐 아니라 간병하는 보호자들도 간식거리를 챙겼다. 심한 통증의 고통 속에서도 주고받는 손길에 정이 흘렀다. 환자와 환자 사이, 보호자들 간에도 따뜻한 정이 솟았다. 아픔 속에 흐르는 정은 세상인심과는 크게 달랐다. 처지가 같은 사람끼리 서로 위로하며 나누는 정이 그리움으로 이어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병원은 어깨나 무릎관절을 수술하는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입원기간을 짧았다. 길어야 2-3주였다. 나는 입원기간이 7주 이상이 되어 병실에서 왕고참이었다. 입원 4주가 되어 다소 회복되고 정신이 들자, 환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의 행동에서 그의 개성과 성품이 보였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만투성이이며, 자기의 처지를 비관적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있었다. 긍정적이면서 자기의 처지를 수용하고 재기하려는 당찬 사람도 있었다.
수없이 들고 나는 환자들 가운데 내 마음에 파문을 던져주는 사람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의 젊은 남자와 그에 잘 어울리는 미녀가 병실에 들어섰다. 문병 온 부부로 알았더니 남자는 환자였다. 내 막내아들 또래로 보여 관심이 더 쏠렸다. 복대를 두른 환자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다정해 보이는 그들 부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환자는 심한 통증으로 끙끙 앓았다. 밤에만 나타나는 부인은 거르지 않고 간식꾸러미를 싸들고 와서는 환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 뒤 남편을 돌봤다.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물수건으로 남편의 몸을 닦아주고 간병하며 밤을 새웠다.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는 부인이 천사 같았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측은하가까지 했다. 낮에는 죽을 듯 괴로워하던 환자는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아내가 돌아오면 애써 밝음 표정을 지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워 보였다.

환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병세를 내게 말했다. 허리에 이상이 있어 진단을 했더니 척추암이라 하여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대 수술을 했단다. 뿐만 아니라 암세포가 전신으로 전이(轉移)되어 치료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위와 장의 통증이 심해서 꾹꾹 참으려 해도 어르신께 추한 꼴을 보여 죄송하다는 말까지 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을 새며 간호하는 젊은 여인의 순애보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어느 날 여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유순하게 보이는 5살, 7살 두 아이들은 아비의 품에 안겨 부자의 정을 나누었다. 환자는 말했다.
“어르신! 이래도 저는 똑똑한 두 아들을 두었으니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웃는 청년의 얼굴에는 우수(憂愁)가 서려있었다. 나는 병실 고참의 임무를 청년에게 넘겨주며 간곡히 말했다.
“자네의 당찬 심성과 부인의 지성으로 기적이 일어날 걸세, 부디 굳건한 정신력으로 건강을 찾게!”
나는 청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청년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빌며 돌아서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2009.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