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목요일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었다. 남선이가 안부전화를 하며 미국생활의 불편을 하소연하였다. 가슴이 뭉클해 남선이에게 사총사의 소식이라도 빨리 전해주고 싶었다. 곧바로 병은, 원명, 희석이와 오늘 모악산 산행을 약속한 것이다.
남선이는 고등학교 3학년 같은 반이고 집이 서학동이라 가까이 지냈다. 남선이와 입학을 며칠 앞두고 우연히 UBF(대학생성경읽기)센터에 들러 그 동아리에 붙잡혔다. 전주교육대학교 신입생인 병은, 원명, 주호, 희석, 용덕이를 거기서 만났다. 우리는 날마다 등교해서 20분쯤 모임으로 하루를 열었다. 강의가 끝나면 전동센터에 가서 전북대학교, 전주간호대학, 우리 대학의 남녀학생들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였다. 일요일 오후에는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룹영어성경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친교도 나누었다. 방학 때는 특별 프로그램도 같이 했다. 학교간의 벽이 무너지고 선후배와 동기가 뚜렷해져 형과 누나, 형제와 자매라 부르며 친 형제자매처럼 지냈다. 1학년 때 용덕이가 입대를 했다. 우리 여섯은 한 지붕 아래에서 청년시절을 동고동락해 서로가 거울을 들여다보듯 하였다.
졸업한 뒤 햇병아리 교사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울러 우정도 흩어졌다. 첫해는 서울 여름수련회에 함께 참여했지만 그 뒤로는 각자 일을 핑계로 만나기가 힘들었다. 결혼식을 할 때도 지금처럼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여 그 황금기의 추억이 비어 있다. 나는 목요일에 결혼식을 했더니 아무도 오지 못했다. 나 혼자 겨우 남선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남선이는 이태를 근무하고 신학을 하다 현역 군복무를 마쳤다. 신학을 계속하더니 목사가 되어 익산시 관내 교회로 부임해 왔었다. 그 때부터 우리의 만남은 다시 불이 붙었다. 20여 년 전일 것이다. 모임 이름도 ‘성우회(聖友會)’라 짓고 회비도 내며 한 해에 두세 번씩 모였다. 그런데 중등 음악교사가 된 주호가 인천으로 이사를 가 몇 번 참석하다 아예 빠져 아쉬움이 컸다.
신나게 모이다 남선이가 이리시내 교회를 사임하고 미국 텍사스주로 훌쩍 유학을 떠났다. 양 날개를 잃은 새가 된 우리 넷은 매년 방학 때면 어김없이 모였다. 남선이가 고국에 올 땐 한두 번은 더 모인다. 용덕이를 찾아 안으려 했지만 한 번 참석하고는 그만 두었다.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늘 곁에 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곤 한다. 기쁨은 갑절로 늘리고 슬픔은 절반으로 줄여주며 지낸다.
우리의 만남의 역사는 수십 년이 차곡차곡 쌓였다. 만날 때마다 자연을 벗 삼아 호연지기를 나누고, 복지시설 탐방, 선배 방문, 운동 등으로 우정을 다져왔다. 그리고 5년 전부터는 만나면 산행과 유적답사를 해 만남의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내장산, 모악산, 오봉산, 천주교 성지 등을 다녀왔다. 점심과 저녁 밥상머리에는 세상만사 이야기로 시끌벅적하여 밥맛이 꿀맛이다.
모악산은 오늘이 세 번째이다. 월요일 아침나절 모악산은 적막했다. 완주군 구이 쪽 입구에서 대원사 길로 가다 ‘전주김씨시조묘’표시를 따라 왼쪽으로 갔다. 처음길이라 호기심을 갖고 능선을 올랐다. ‘전주김씨시조묘’를 지나 심한 오르막이 이어져 서너 번 쉬면서 남봉(南峰)에 닿았다. 처음 와 본다며 아이들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난 신정 때 장관이었던 눈은 온데간데없고, 햇빛을 등지고 있는 골짜기의 나뭇가지는 하얗게 눈꽃을 피워 우리를 보고 손짓하는 것이 아닌가?
작년부터 개방한다는 한국방송공사(KBS) 모악산 송신소 쪽으로 내려갔다. 통제 문으로 들어가 꼭대기로 올라가니 793.5km라 쓰인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에야 진짜 모악산 정상을 밟게 되어 감개무량하였다. 정상정복기념사진도 찍었다. 지금까지 정상이라고 오른 곳은 한참 내려다 뵈는 곳이었다. 정상을 처음으로 오른 것은 우정의 값진 추억거리 하나 더하여 어깨가 으쓱해졌다. 골짝 골짝에서 산마루를 타고 급히 올라온 바람을 안고 안전시설 길을 따라 멀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늘도 원명이를 보니까 갑자기 옛 생각이 났다. 언제인가 한여름에 남선이와 섬진강 강변 임실 신평 시암내에 갔었다. 땡볕 더위를 식히러 물에 뛰어들었다. 한참 놀다 나와 남선이와 옷을 입었는데 원명이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노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갑자기 허우적거리는 것이었다. 겁이 덜컥 났었다. 고등학교 때 응급처치요령을 배웠지만 주위에 아무것도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물속으로 네댓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는 쭈뼛해졌다. 마침 자맥질을 하며 고기를 잡던 청년이 있어 손짓을 했었다. 그 청년이 펼친 구원의 손길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만약 사고라도 났다면 어떠했을까?
내려오다 무제봉에서 잠시 쉬었다가 수왕사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서 대원사를 지나니 2시가 넘었다. 한 발짝이라도 가까운 음식점으로 가자고 목청을 높였다. 김치찌개 백반을 먹으며 못다 한 이야기꽃을 활짝 피웠다. 10년도 넘게 남선이가 미국에 있을 때 미국을 다녀오자고 회의록에 기록해왔다. ‘멀리 가려면 친구와 같이 가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사총사에게는 맞지 않은 이야기 같았다. 우정의 농도로는 진작 두 번도 더 다녀왔을 것이다. 모두 현직에서 퇴임을 하고 내후년 5월에 부부동반으로 미국여행을 하기로 다시 결의를 했다. 이번만은 소원이 기어코 이루어지도록 우정의 농도를 더 끌어 올려야지 않을까 싶다.
벌써 예순이 넘어 퇴임을 1,2년쯤 남겨 놓고 있다. 재작년부터 퇴임하면 달마다 하루는 산행을 하자고 다짐하고 있다. 이 우정은 신앙이 자양분 되어 세상 끝까지 이어질 것 같다. 대학시절에 싹을 틔운 우정은 깊게 뿌리를 내리고 키가 크고 가지가 쭉쭉 뻗는 나무가 되었다. 이제 그 그늘은 쉼터로 내주고, 높은 나뭇가지 사이에 새둥지를 틀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쯤 되면 사총사는 죽마고우(竹馬故友)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2010.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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