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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윤효숙
ㆍ작성일	2010-01-10 (일)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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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의 추억
함박눈의 추억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윤효숙

다갈색 커피 위에서 하얀 우유가 거품을 일으키며 춤추고 있었다. 상큼한 바닐라아이스크림에 향 짙은 에스프레소를 섞어먹는 아포가또커피 또한 혀끝에 감도는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맏언니에겐 앙증맞은 유리 주전자에 담긴 그윽한 허브티가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12월 마지막 수필공부를 하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눈 내리는 날엔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수업 중에 못 다한 정 깊은 대화를 마음껏 하고 싶다는 생각에 우리 몇은 2차로 피푸티(50)커피숍으로 향했다. 대화중에 맏언니가 오늘 있었던 일을 수필로 써보자고 제안하였다. 난 함박눈에 얽혔던 지난 일이 생각났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꿈이 있다. 젊은이에게는 현재와 미래의 꿈이 있고 좀 더 나이든 이에게는 과거형의 꿈이 있다. 나도 후자에 속하기 때문에 소녀 때는 H대학에 진학하여 화가의 길을 가는 것이 꿈이었다. 형편상 그 꿈은 좌절되었고 교육대학을 막 졸업하고 농촌에서 교직생활을 할 때의 꿈은 캠퍼스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서울에 있는 K대학에 편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가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친구를 밤늦도록 설득하여 2년 후에 돈을 모아 실행하기로 하였다. 결심한 후에는 앞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운동화와 바지 차림으로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며 내일을 다짐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가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시골에서 꼬마들과 씨름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나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갈 수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2년이 지난 여름방학 때 서울 K대학에 사전답사를 갔다. 편입생을 모집하는지 물어보니 아직은 계획이 없다는 것이었다. 큰 딸인 나는 누가 지도해주는 이도 없었고 부모님은 내가 적당한 때가 되면 시집이나 가는 줄 아시기 때문에 상의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기를 6개월, 겨울 방학이 되었다. 그날도 오늘같이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대지는 온통 수북한 함박눈으로 덮였다. 너무 많은 눈 때문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오직 고요 그 자체였다. 며칠씩 근무하는 일직 마지막 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신문을 펼쳐들었다. ‘편입생 모집’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것도 내가 포기한 그 대학교의 모집광고였다. 그런데 마감 날짜가 오늘이었다. 그때가 세 시, 지금 간다고 해도 차가 없거니와 시간이 촉박하여 졸업증명서 등 서류를 갖출 수도 없었다. '아! 불가능하다.' 암에 걸린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연인의 절망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심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아야만 하였다. 그나마 굳게 약속한 친구도 대학진학의 길이 막혀 친구와 나는 한 때의 꿈으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동안 직장 때문에 시간이 없어 동창회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시간이 있어 보고 싶은 친구들을 만나보려고 동창모임에도 들게 되었다. 꿈 많던 여고시절 명문대에 진학하여 결혼도 그에 맞게 잘하여 잘 살고 있는 친구들, 일찍이 사업가의 길을 갔던 친구, 모두가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공백을 느끼지 않는 듯 서로 옛 추억을 되살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 때는 부러웠던 친구들도 모두 이젠 어쩔 수 없는 아줌마나 할머니가 되어 자녀 결혼이야기부터 손자손녀 자랑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나이가 들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손자를 길러 주어야하느냐 마느냐가 관심사로 떠오르는 걸 보니 영락없는 할머니들이었다.

며칠간 눈 때문에 미루어오던 건지산 산책을 다녀왔다. 날씨만 보아서는 햇빛 때문에 푸근할 것 같았지만 역시 절기는 무시할 수 없어 찬바람이 몸을 파고들었다. 아직도 잔설로 하얗게 덮인 산길은 눈 속 땅이 빙판이어서 미끄러질 것 같아 가장자리를 택하였다. 낙엽이 쌓여있어 최소한 넘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평평하게 보이는 그곳에 발을 딛자마자 푹 빠져버렸다. 위험한 빙판길도, 평평한 낙엽길도 모두 하얗게 덮어버리는 함박눈! 대자연에 골고루 흩뿌려주는 함박눈! 이런 자연 앞에 나의 삶이 조금 고되다고 아우성치고, 내가 조금 누린다고 교만했던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높은 산도 낮은 골짜기도 지저분한 골목길도 멋진 잔디밭도 모두 덮어버리는 함박눈 앞에서는 겸허하게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함박눈이 내리는 날, 잊어버린 옛이야기를 떠올리게 한 수필반과 함박눈은 또 다른 추억의 한 페이지로 기억될 것 같다.
(20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