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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채선심
ㆍ작성일	2010-01-10 (일)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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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일탈
하루의 일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채선심

눈이 올 것 같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남편의 말을 못들은 체 내 차를 고집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간간이 내린 눈발이 차창에 부딪쳤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부딪치며 모처럼 일탈을 꿈 꾸게 했다. 농한기가 되면 읽고 싶은 책도 실컷 읽고, 여름내내 쓰지 못한 수필도 쓰려고 알찬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농사와도 거리가 한참 멀어진 지금, 잡다한 집안 일로 자유롭지못한 건 마찬가지다.

이렇게 눈이 폴폴 날리는 날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 가득 고여오곤 한다. 가만가만 내리는 눈을 밟으며 누군가와 오래오래 걸어보고 싶은 건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탓인가 보다. 강의실에서 보는 설경은 촌락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바쁜 일상을 포근히 덮어 쉬게 하려는 마음이 농촌의 눈이라면, 도시에서 만난 눈은 삭막한 콘크리트 숲에 싸여있는 도시 사람들에게 낭만을 제공해 준다고나 할까. 빈 나뭇가지를 헤집으며 사뿐거리는 눈은 강의시간에도 자주 나의 시선을 밖으로 끌어냈다. 가슴 깊숙히 묻어둔 추억을 펼쳐 눈발에 실어보내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가 쉽지 않았다. 점심상을 사이에두고 마주한 문우들 역시 바깥풍경에 자주 시선을 뺏기곤 했다.

"우리 오늘 전주천 산책길을 걸어 볼까?"

꾹꾹 눌러 참았던 말이 나이도 잊은 채 입술을 비집고 나와버렸다. 몇 번을 망설이다 한 나의 말에 동의해 주는 문우들이 참 반가웠다.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탄 우리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출발해 전주 서신동에서 만났다. 집이 그 곳인 ㅈ문우가 인도한 것 같았다. 목소리 자체가 구수한 맛을 풍겨 정감이 가는 그 문우는 분위기 좋은 다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은은한 음악과 유독 깔끔한 실내장식이 인상적이었고, 햇빛이 가끔 눈발을 비집고 우리를 훔쳐 보며 비실비실 웃고 지나갔다. 과감하게 일탈을 시도한 시골 아낙이 대견스러운 모양이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엎어진다는데 다섯 여자가 모였는데도 접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성인들답게 말을 아끼는 그들에 비해 푼수처럼 많은 말을 한 건 내 쪽이었다. 신춘문예에 응모한 문우들에게 상금을 받으면 한 턱 쏘는데다 쓰라고 했더니 좋다고 반겨 주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당선이 되면 얼마나 좋으랴.

나와 신춘문예는 아직 거리가 있기에 더 많이 공부를 해서 내년쯤에는 꼭 도전해 볼 계획이다. 잔잔한 음악에 정신을 빼앗겼는지 도무지 일어날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입을 연 것도 나였다.

"천변은 언제 걸을려고?"

그러자 이런 날씨에 누가 천변을 걸을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처음부터 그들과 나는 동상이몽이었나 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을 맞으며 걸어 보겠다던 소녀같은 나의 희망은 김 빠지는소리와 함께 맥없이 스러졌다. 천변도 걷지 못할 거라면 남편과의 약속을 어기지 말 걸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촌부의 일탈을 위해 시간을 내준 문우들이 참 고마웠다. ㅈ문우는 차값을 치르느라 돈 좀 들었을것이고, ㅂ문우는 꽃가게 문에 빗장을 지르고 우리와 합류해 주었다. 뿐만아니라 차가없는 문우들의 귀가를 위해 호성동으로 서학동으로 다시 평생교육원을 오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새해에도 ㅂ문우의 화원에 큰 발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쌀방아를 찧어야하니 빨리 오라는 남편의 말을 깡그리 묻어버리는 하루였다. 집을 나설 때마다 빨리 오기를 종용하는 남편의 말에 언젠가는 한 번 일을 저질러보고 싶다는 충동이 오늘에야 발동한 것이다. 짐짓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오수천 뚝방을 거슬러 올랐다. 고추 알바람이 속살까지 스치고 건너편의 소나무들은 눈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수줍음을 드러내고 있어서 그 모습이 처연했다. 눈을 뜨지 않고도 빈 복숭아밭을 샅샅이 스치는 눈발, 전선줄에 걸려 울음을 토해내는 칼바람,

시인들은 그 모습을 뭐라 노래할지 궁금했다.

까짓것 잔소리 좀 듣고 말지하던 대담함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집이 가까워지면서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일상이 무겁고 힘들 때면 가끔씩 멀리멀리 내다 버리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늘도 새하얀 꽃가루를 뿌리며 나의 일탈을 축하해 주었다.

(2009년 12월 31일 목요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