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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형효순
ㆍ작성일	2009-04-30 (목)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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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단상
봄날의 단상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이심실 사래 긴 밭가에 옥수수를 심었다. 알록달록한 얼룩배기와 상아같이 뽀얀 찰옥수수를 심었다. 두 달 뒤에는 알갱이가 촘촘하게 들어찰 것이다. 어금니가 막 나기 시작한 서린이가 옥수수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는다. 옥수수 심을 때 웃거나 말을 하면 듬성듬성 알이 박힌다는데 어쩌랴, 손녀생각만 하면 바보처럼 혼자 웃는 나를 발견하니, 옥수수 심을 자리에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한 호박쪼가리를 뽑아내자니 안쓰러웠다. 아무리 하찮은 잡초라도 살려고 나온 것인데, 그것들이 가진 의미 하나하나 새겨보면 소중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덩달아 뽑혀 나온 시름꽃을 언덕배기에 옮겨 심어준다. 아지랑이가 현란한 들판에 움직이는 것은 노랑나비 한 마리와 땅을 파는 호미소리, 앞산에 쑥국새가 목이 쉬도록 짝을 찾는 울음소리뿐 이심실을 찾아온 봄은 조용하다.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내 주변에는 봄이 지천이지만, 평소 존경하던 지인의 봄맞이를 가자는 전화에 선뜻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어디에도 봄빛이 완연하다.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작은 풀꽃이 소리 없이 피어있다. 내 엄지손톱에 다섯 송이가 올라 갈만큼 작은 꽃이 앙증맞게 웃고 있다. 예전에는 이렇게 작은 꽃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화려한 장미에게 먼저 눈이 가고, 향기가 짙은 국화에 매혹되며, 요염한 나리꽃에 마음을 빼앗겼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을까마는 들에서 핀 작은 풀꽃이 더욱 애잔하고 정다워 보이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철이 든 탓일 게다.
쌍계사 벚꽃은 이미 꽃비를 내리고 있었다. 봄은 그곳에도 이미 만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숙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편하게 산다고 서울로 올라가시더니 70도 못다 살고 가신 이숙님은 복숭아 과수원에 계실 때가 차라리 행복하셨다. 떨어지는 꽃잎에 이숙님의 한평생이 흩날린다. 자연은 봄에 다시 소생하건만 인간은 돌아갈 때 봄과 겨울이 없다.
엊그제 찾은 친구 남편 병문안 때 남편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어 감사하다는 친구나 이런 고통을 끝내고 돌아갈 곳이 있어 차라리 편안하다던 친구남편의 퀭한 눈매가 이 화창한 봄날 너무도 슬프다. 허나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사는 동안 그리 애틋할 일도 없을 것이며 미운 사람을 용서할 수도 없고 욕심 또한 한이 없을 것이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오래로 하루를 허비할 것이다.
화엄사 저녁예불을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중생의 번뇌를 구제하기 위해 두드리던 법고는 두 개의 북채로 마음심 자를 그리면서 치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의 장삼소매와 날렵하게 움직이는 북채와 경쾌하기까지 한 북소리는 수없이 내 가슴을 두드리면서 묻고 있었다. 이봄에 너는 무엇을 얻기 위해 여기에 서 있느냐고.
얻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버리고 싶은 마음이 많은지라 잠시라도 부질없는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서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중생을 위해 두드리는 법고, 물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물고기를 제도하기위해 두드리는 목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와 곤충을 제도하고 허공을 맴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두드리는 운판, 지옥에 있는 중생까지 제도하고 살아있는 중생의 번뇌를 사라지게 한다는 범종소리는 골짜기를 울리고 길게 여운을 남기면서 밖으로 펴져나갔다. 회색빛 스님의 옷이 어스름에 잠겨 스님이 사찰인지 사찰이 스님인지 시끄러운 속세가 아득하다. 풀어지지 않는 어지러운 마음을 부처에게 맡겨두고 섬돌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왔다. 사찰도 산도 나무도 모든 사물이 어둠에 묻혀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고자 어둠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오늘 하루, 나도 어둠에 밀려 저만치 가고 있다. 왜인지 그 모습이 낯설다.
형효순, 한문으로 풀이하면 효도 孝자에 순할 順자를 쓰다 보니 효녀나 효부로 살라는 이름 탓에 가끔 반항하고 싶다가도 이름풀이를 생각하고 참았던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오래전에 아는 분이 라원(羅園)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그곳에 이 봄처럼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어 가꾸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차라리 이름 그대로 있을 걸 공연히 숙제를 하나 더 맡은 것 같아 버거울 때가 많다. 비단 같은 아름다운 동산은 만들 수 없더라도 작은 풀꽃일지언정 분수에 맞는 몸짓과 향기를 지닌 소박한 동산이었으면 한다. 누구든지 언제라도 찾아와 잠시 쉬어 가도 티내지 않는 편안한 동산하나 만들기를 소원하지만 아직은 헝클어진 가시조차 제거하지 못하고 가꾸고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언제쯤 향기 짙은 글밭을 이룰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지치고 피곤한 마음을 서로 다독이면서 위안을 나눌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서는 지인의 어깨에도 내 머리에도 꽃잎이 앉았다. 그 꽃잎은 오늘 하루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우리와 상관없이 봄날은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