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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이경옥
ㆍ작성일	2009-04-26 (일)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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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
흰머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목요야간반 이경옥

요즘 여기저기 온통 꽃 세상이다. 세상만 꽃 천지가 아니다. 내 머리에도 꽃이 피었다.
얼마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며 남편에게 흰 머리가 많다고 머리를 들썩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별로 없구먼, 당신 나이에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야.”
남편의 반응이 야속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해서,
“우리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염색 한 번 안하고 세상을 떠나셨는데 나는 당신을 만나 신경을 많이 쓰고 살아서 그래!”
미운소리를 해댔다. 평소 머리숱이 적어 머리를 감을 때마다 머리가 빠진다고 안타까워하는 남편은 흰머리라도 수북했으면 좋겠다고 늘 말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마디 했다.
“나는 흰머리라도 많이만 있었으면 좋겠네!”
집에 들어가서도 계속 까만 머리를 밀어내고 솟아나는 흰 머리카락들이 미워서 ‘이것들을 다 뽑아버릴까 아니지, 그러다가 대머리가 되면 어쩌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머리가 욱신거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피할 수 없는 게 흰 머리카락이다. 그런 걸 가지고 내가 남편에게 미운소리를 한 것은 적절치 않은 처사다. 남들처럼 자식을 많이 낳아 자식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한 것도 아니고, 시부모님과 시동생들 건사하느라 마음고생을 한 건 더더욱 아니다. 술 담배를 안 하고 가정적인 남편을 만나 편하게만 살았는데, 왜 남편에게 투덜댔는지 속으로는 미안해서 죽을 맛이다. 괜스레 말을 걸어 보았다.
“저녁은 무얼 먹고 싶은데?”

며칠 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웃더니 자기가 쓴 시라며 들어보라고 했다. 제목은 <흰머리를 뽑는 여인>이었다. 제목만 듣고 “뭐야! 내 애기잖아? 당신은 내 흰머리가 그렇게도 재미있어?”
하고 돌아서려는데, 남편은 잘 들어보라면서 계속 읽어 내려갔다. 웃음으로 시작된 남편의 시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안쓰러움으로 끝을 맺었다.
“겨우 흰머리 좀 난 거 가지고 뭘 그리 깊이 생각했어? 나이 들면 다 생기는 것을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그래도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많이 안 난 거야. 몇 년 전부터 염색하는 친구들도 많은데, 나는 이제 겨우 시작이잖아? 당신 잘 만나 마음고생을 안 하고 살아서 이 정도지 그렇잖았으면 아마 할머니가 되었을 걸?”
내가 생각해도 여자들이란 참 알 수 없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지옥과 천당을 오가니 말이다. 이걸 변덕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차라리 일체유심조(一切有心造)라고 근사한 변명으로 일축해야 하나?

흰머리, 이 녀석도 내 몸에 난 터럭이니 사랑해 보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남편은 나에게 염색을 하라고 권유했다.
“염색은 안하려고 하는데! 나는 반백이어도 어울릴 것 같지 않아?”
그랬더니 남편의 말이 걸작이었다.
“당신의 얼굴은 아직 흰머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아서 꼭 염색을 해야 해.”
흰머리를 받아줄 만큼 얼굴에 적당히 주름도 있어야 하는데 아직 학생티를 면치 못했다는 것이었다. 말씀인즉 맞는 말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학생으로 입학했으니 학생티를 면치 못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칭찬을 과제로 내 주시는 교수님의 얼굴이 잠시 스쳤다. ‘오호라! 이래서 칭찬이 좋은 거구나!’ 아무래도 내 남편은 나를 기분 좋게 하는 마술사인가 보다. 희끗희끗 꽃 같은 흰머리가 늘어나면 남편이 내게 건네줄 칭찬도 더 늘어갈 것이려니 싶다. 흰머리가 느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2009.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