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장병선
ㆍ작성일	2009-05-04 (월) 20:34

ㆍ추천: 0 ㆍ조회: 2512

아내의 건강
아내의 건강
행촌수필문학회 장 병 선

얼마 전부터 아내의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 눈이 불편하니 오르내리는 계단을 싫어하고, 외출을 하였다가도 저녁때가 되면 일찍 귀가를 서두른다. 20여 년 전에는 아내가 친구들과 모임이 많았는데, 이제는 한 달에 두서너 번 정도만 모임을 나가고 있는 듯하다. 아내가 주로 집안에 머물러 답답한지 전보다 웃음이 줄어들었다. 의사를 찾아가 진찰하여 통원치료도 1년 넘게 다녀보고,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큰 수술도 받아 보았지만 시력이 쉽게 좋아지질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 했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회복이 더뎌 걱정이다.

젊은 시절, 아내가 시력이 유달리 좋아 그랬는지 매사에 관심이 많았던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내가 몸이 불편하여 일찍 직장에서 돌아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아내는 내 핸드폰을 들고 와서 잠자고 있는 나를 깨우면서
“모르는 번호가 핸드폰에 찍혔는데 누구 전화번호예요?”
하고 따져 물었다. 나는 잠결에
“나도 모르니 전화를 걸어보면 될 것 아니오?”
되받았다. 연결해 보니 수신인은 예쁜 여자였다. 그 일로 한동안 옥신각신하였다. 여성이 상품 선전을 위해 내 번호에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그 뒤 나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아내는 귀를 쭝긋 세운다.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그랬을까.

또 아내는 내 호주머니에 가끔 손을 댔다. 다음날 친구와 점심을 먹고 밥값 계산을 할 때야 내 지갑이 가벼워진 것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남편 주머니의 돈을 아내와 좀 나눠 쓰면 되지 않느냐고 우겼다. 또 남자가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면 바람을 피운다며 오히려 역공을 펼쳤다. 그 당시에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 쥐꼬리마한 봉급으로는 살림살이가 힘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대개 출장을 갈 때면 서류가방을 가지고 간다. 그런데 출장을 다녀 오면 아내는 가방을 뒤진다. 한 번은 퇴근하고 집에 오니 내 가방 속에서 야한 그림책과 이상한 약이 나왔다고 야단이었다. 출장 중에 심심해서 보았던 성인잡지를 그냥 놓아둔 것이 화근이었다. 또 오래 전 동료가 주었던 상비약도 가방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 일로 며칠간 아내와 대화가 단절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남자가 호기심으로 즐겨 본 그림책과 상비약도 아내가 싫어할 것 같으면 흔적 자체를 없애 버려야 했다.

젊은 시절 서로에게 설익은 관심으로 애를 태웠던 지난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하찮은 불씨를 키워 다투었던 젊은 시절이 이제는 나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아쉽기만 하다. 지나친 관심이 쓸데없는 간섭처럼 여겨져 미워했던 시간이 이제는 오히려 그리워진다. 그래서 부부는 살아가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며 같이 늙어가고 있는게 아닐까.

엊그제 모처럼 단비가 촉촉히 내렸다. TV 연속극을 보고 있는 아내를 설득하여 전주월드컵경기장 주변으로 산책을 나섰다. 가로수가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길 옆 화단에는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도로에는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씽씽 달렸다. 승용차들은 세월을 싣고서 빠르게 달려가는 듯했다. 30대 때는 세월이 30km로 흐르는 듯하였지만 이제는 세월이 70km의 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건널목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뀐다. 아내의 손을 잡고 건널목을 천천히 건넜다. 손등에 느껴지는 아내의 온기가 따뜻했다.

경기장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경기장을 빙글빙글 돈다. 잔디밭에서는 젊은 부부가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내는 멀리 사는 손자가 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 토요일에는 손자를 보러 익산에 가야겠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마음이 열려 건강이 좋아진단다. 아내가 세상만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젊었을 때처럼 항상 웃었으면 좋겠다.

남편이 외출하여 귀가가 늦어지면
“어디서 지금까지 무얼 했느냐?”
따끔하게 큰소리로 물어도‘남편에 대한 관심이구나’하고서 이제는 내가 여유를 가지고 아내를 바라보고 싶다. 아내가 어서 건강을 되찾아 외출도 자주 했으면 한다. 친지들과 여행계획이 세워지면 어서 가자고 졸라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우리가락의 풍물도 마을회관에서 함께 배운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