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참 멋스럽다. 귀티 넘치는 창백한 얼굴, 조금은 서구적이며 이지적 마스크, 반 곱슬머리와 훤칠한 키에 정장을 한 차림새는 잘 빠진 무처럼 매끈하다. 얼굴을 반쯤 가린 크고 까만 굵은 테의 색안경이 어쩌면 매력 포인트이며 트레이드마크다. 피아노 앞에서 감미롭고 때로는 폭풍노도 같은 선율을 연주할 땐, 깔끔한 세련미가 돋보인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그를 매스컴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퍽 궁금해 하다 몇 해 전 패티김에게서 그분이 오랫동안 투병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수필을 사랑한 법정 대선사의 열반으로 대다수 국민이 슬퍼하고 있고, 짧은 인연이지만 내 마음도 편치 않다. 조계산 송광사 다비식에 참석,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던 계획을 <전북 수필과 비평 작가회> 3월 정례모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야 했다. 종남산 송광사에 들러 수필가 S보살님과 귀천을 빌기로 마음을 추스르고 귀갓길을 재촉했다. 법정 스님의 입적의 메아리가 국내외로 잔잔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 나라 가요계의 큰 별, 대중음악의 천재작곡가 박춘석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풀고 존경을 받던 두 분을 잃은 슬픔의 눈물인 양 봄비가 메마른 겨울나무 가지를 애잔히 적셨다.
1983년으로 기억된다.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KBS와 대한적십자사가 3개월간 기획, 방송한 일이 있었다. 천만 남북이산가족, 아니 7천만 한민족을 눈물바다로 이끌었던, 애간장을 녹인 배경음악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민족의 한(恨)과 애절함이 극치를 이룬 명곡이다. <남과 북> 역시 영화주제가로서 1965년에 발표한 박춘석 선생의 작품이다. 클래식 성악을 전공한 서울대 음대 출신 최양숙이 부른 <황혼의 엘레지>는 1954년 그의 데뷔곡이자 히트작이었다. <호반에서 만난 사람> 역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한민족의 한과 애환을 여러 단계 승화시킨 세미클래식 곡들이다.
암울했던 1960년대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는 지식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해마다 봄의 전령사처럼 정제된 노래 패티김의 <초우>를 비롯한 <못 잊어>, <가시나무새>,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불꽃>. 파월장병의 애창곡이었던 남진의 <가슴 아프게>와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별아 내 가슴에>. 청순 발랄한 청소년들의 꿈과 이상이 잘 그려진 전원풍경 같은 박재란의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트로트 음악의 으뜸이며 우리민족의 절제된 슬픔을 노래한 이미자의 <황혼의 블루스>, <섬마을 선생님>. 그 외에 <비 내리는 호남선>, <삼팔선의 봄>, <안개 낀 고속도로>, <아리랑 목동>, <마포종점>등 셀 수 없이 수많은 애창곡을 남겼다. 또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 라훈아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일급 가수들의 절대적 사부였었다. 후배 작곡가 길옥윤, 이봉조와 동료로서 때론 경쟁자로서, 고급스런 대중음악을 선보여 암울했던 1960~70년대 고뇌하던 지식인들에게 꿈과 용기와 위안을 주지 않았던가.
그는 1930년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천재성을 보인 신동이었다 한다. 당대 최고 명문이던 경기중학(경기고)교와 서울대 음대에서 수학하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 여든이라는 짧지 않은 생을 마칠 때 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평소 음악(작곡)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한다. 정녕 천재의 길은 외롭고 고독한 여정인가. 2,700여 곡을 유작으로 남겼다고 한다. 작곡뿐 아니라 노랫말에도 특출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노랫말은 시적이었다. 요새 풋내기 시인들이 쓴 시보다 훨씬 사람냄새가 난다. 그의 노랫말은 서정시라 해도 손색이 없다. 어쩌면 잘 쓴 서정수필의 한 구절처럼 잔잔한 감동과 맑고 고독한 사색을 느끼게 한다.
그의 제자들과 주위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카리스마와 번뜩이는 지성을 겸비한 천재성이 돋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정 많은, 인격존중과 제자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난 끼가 많은 천진난만한 자유인이었다 한다.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16년간 식물인간, 긴 휴면시간을 갖게 되었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온 정열을 불사른 결과였으리라. 주옥같은 명작의 탄생이 정지된 아쉬운 세월이었다.
나는 노래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늘 노래를 부르는 곳의 변두리에 서 있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음치의 고수란 소리를 들을 정도이니 그러려니 마음 접은 지 오래다. 50여 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노래 부르는 것은 서툴지만 듣는 것은 조금 낫다. 알맞은 귀 밝기와 가슴이 열려있기에…….
그는 대중음악을 예술적 가치상승이라는 경지로 끌어올린 선구자이다. 대중음악을 세미클래식 장르로 이끈 개척자이기도하다. 어느 분야건 그 시대의 최고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고난 능력, 피나는 노력, 시대와의 조율, 우연한 행운 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법정 스님의 열반에 가려 퇴색해진 이 시대의 천재작곡가 박춘석 선생의 죽음이 재조명되고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두 분은 두 살 터울의 동년배이니 어쩌면 저 세상에서 친구로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무소유>의 법정 스님은 노랫말을 짓고 <초우>의 박춘석 님이 곡을 붙이면, 분명 불후의 명곡이 탄생할 것이다.
그의 데뷔작인 <황혼의 엘레지>가 운명처럼 그의 대 히트작 <초우> 속으로 사라져 간다. 창밖 변덕스런 날씨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매화나무에도 봄비가 내린다. 그는 갔지만 노래는 남아 오늘같이 우울한 날 나를 청소년시절로 시간여행을 시킨다. 먼지 낀 오디오에선 매력의 목소리 최양숙의 <황혼의 엘레지>가 귓전에 맴돌아 가슴을 후빈다. 아니 유리창을 두드리는 봄비, 보슬비에 촉촉이 젖어 애수의 추억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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