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북어 댁리'를 보고
연극 ‘북어 대가리’를 보고
행촌수필문학회 석인수
엉겁결에 작품 몇 편 낸 것이 채택되는 바람에 어쭙잖게 수필문단에 발을 디딘 지도 어느새 3년이 되었다. 그 바람에 내로라하는 많은 선배 작가들과 동인모임을 갖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늘 뿌듯한 자부심도 갖고 지내는 터이다.
2008년 3월 13일. 그날도 선배 동료 수필가들의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지금까지 두 갈래로 모임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하나의 모임으로 통합하고 두 번째로 만나는 날이었다. 새로 뽑힌 회장께서 모일 때마다 다양한 이벤트(event)같은 것을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어 그날은 그 첫 번째로 전주 창작극회가 마련한 「북어대가리」란 연극 공연을 관람하자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연극에 대한 관심도 없고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며 흥미도 없었다. 어쩌다 TV나 신문 등에서 배경 동영상이나 머리 그림으로 잠깐씩 나오는 것과 관객 앞에 배우가 직접 등장해서 연기하는 것이라는 정도 이상은 아는 바 없는 나였다. 내 나이 예순이 되도록 연극 한 번 관람하지 않았다면 내가 생각해도 무던하다.
그래서인지 한 번 관람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행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창작소극장」을 찾았다. 정말 말 그대로 조그마한 소극장이었다. 지하층이었는데 마치 창고 같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래도 아쉬운 대로 100명 정도는 앉을 수 있다고 했다. 처음 관람하는 것이라서 분위기도 낯설고 어색했지만 공연이 기다려졌다. 공연 관계자의 관람 시 주의사항이 끝난 뒤 무대의 불이 꺼지고 캄캄하던 무대가 조명 불빛과 함께 서서히 밝아 오면서 공연의 막이 올랐다.
연극에 대하여 아는 바는 없지만 평소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연기(演技)하는 모습을 필름에 찍어 동영상으로 보는 영화는 관객이 없이 연기해도 되지만 연극은 배우가 관객 앞에 나와 관객이 보는데서 실수 없이 직접 연기해야 하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라고. 그래서 배우보다 내가 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우였다. 역시 평소에 연극에 대하여 무식해서 나온 걱정이었다.
「북어대가리」의 줄거리를 보면 이렇다. 조그만 창고 속에 자앙과 기임이라는 두 명의 창고지기가 살고 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창고 속에서 함께 살면서 상자들을 지키며 입․출고(入․出庫)의 일을 해왔다. 매일 새벽이면 화물트럭이 와서 부속품이 들어있는 상자들을 창고 앞에 내려놓으면 이들은 트럭운전사가 가져온 서류에 기록된 대로 상자들을 분류해서 창고 안에 옮겨 쌓고 내보낼 상자들을 트럭에 실어 보낸다. 그런데 날마다 밥만 먹으면 취급하고 관리하는 이름 모를 부품이 든 상자들에 대하여 두 사람의 창고지기는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자앙은 단 하나의 상자라도 다른 상자와 섞이지 않도록 잘 보관했다가 출고하는 것만이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며 꼭 지켜야 할 수칙이라고 믿다, 그러나 기임은 그 부품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입장을 취한다. 오히려 기임은 다른 창고의 창고지기들처럼 적당히 상자들을 쉽고 빠르게 처리하고 여가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기를 바라면서 자앙에게 그 같은 뜻을 제안한다. 한편, 트럭운전사에게는 다링이라는 별명을 가진 딸이 있는데 그녀는 바람둥이로서 많은 창고지기들과 문란한 교제를 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기임도 포함되어 있다. 기임은 그녀와 결혼해서 창고 밖으로 나가 살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고지식한 자앙은 불성실한 기임의 일하는 태도와 생활 방법을 고쳐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서 자앙은 기임이 다링과의 교제를 그만두고 자기와 함께 평생 동안 창고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기임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기임이 다링을 만날 때마다 잔뜩 술에 취해 돌아오면 의붓어미처럼 잔소리를 하면서도 정성스럽게 북어로 해장국을 끓여준다. 다링은 부속품 상자들을 아무렇게나 다루는 대부분의 창고지기들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앙에게 호감을 가지고 구애하지만 자앙은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창고지기 생활에 권태를 느낀 기임은 상자 하나를 고의적으로 바꾸어서 트럭에 실어 보낸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자앙은 기임을 탓하기보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뒤바뀐 부품으로 뭣인가 잘못 만들어지면 큰 사고가 난다는 것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커진다. 하지만 상자가 실려간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잘못되었다는 연락은 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앙은 온갖 상상의 공포가 더해가고 있는 가운데 상자 주인을 찾아 잘못된 사실을 알리려고 편지를 써 보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해보지만 부품 상자들은 중간 유통과정에 여러 갈래로 흩어지므로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 후 얼마의 세월이 지나고 마침내 동고동락했던 기임은 다링과 함께 창고를 떠나게 되고 자앙은 몸뚱이를 다 잃고 머리만 덜렁남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북어 대가리처럼 덩그러니 멍청하게 창고 속에 홀로 남는다. 단 하나의 상자도 바뀌지 않게 입․출고시켜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을 삶의 보람으로 알고 살아온 그가 공허하고 멍청하게 혼자 서있게 된다. 세상과 타협하고 소통하기보다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앙은 “우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창고야, 이 창고를 벗어나도 결국 다른 창고에 머무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창고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다른 창고에 들어가 본들 결코 행복할 수 없다.”면서 어차피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거대한 창고 속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 있는 말을 던진다.
극중 두 인물은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삶에 대한 사고(思考)와 인식(認識)의 틀이 달라 충돌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시대적 상황과 여건 속에서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이 세상이 정상적이고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모순과 허점투성이로 뒤범벅된 단면도 너무 많은 게 사실이다. 창고 속에 묻혀 산다고 해서 세상과 등지고 산다고 볼 수도 없고 세상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다. 등장하는 네 사람의 주인공들을 통하여 폐쇄적 공간인 창고 속 삶과 창고 밖 열린 세상과의 연결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방이 가로막혀 폐쇄된 공간인 창고지만 문이 있어 모든 물건들이 들어오고 나간다. 또한, 창고는 세상과 벽으로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통로가 마련되어 있어 연결되는 가교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창고 속의 삶이라고 해서 세상을 모른다고 말해서도 안 되고, 세상이 잘못되었다고도 섣불리 말하면 안 된다. 북어는 머리와 몸통 꼬리가 다 붙은 채 살아 있을 때 비로소 대가리가 으뜸이고 우두머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몸통과 꼬리가 다 떨어져 나가 덜렁 머리만 남은 북어 대가리는 더 이상 우두머리일 수 없다. 말 그대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대가리일 뿐이다. 몸통과 꼬리가 있는 정상적인 북어만이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온전한 북어대가리인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도 머리로만 해서는 안 되고 가슴과, 온몸으로 보고, 판단하고,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 연극 「북어대가리」는 어쩌면 폐쇄된 공간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시대 사람들의 표본을 추출하여 극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한마디로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언가 강한 메시지(message)를 시사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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