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눈물
뜨거운 눈물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윤석조
퇴원할 때 받은 진단서를 보다 나도 놀랐다. 이 나이가 되도록 건강한 몸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병원에 입원하여 부모님과 형제들, 자식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세 번이나 있었다. 두 번은 큰 수술이었고, 이번에는 ‘뇌진탕과 우족 관절부염좌’란 상처로 입원하였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꼭 해야 한다는 홍역을,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야 하게 되어 어머니께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었다.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되어 먼 나라로 이주했던 동포들이 돌아왔다. 병도 따라 들어왔는지 학질(말라리아)과 이질, 호열자(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나도 여름이면 학질에 잘 걸려 고생을 많이 하였다. 약이 귀한 때여서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만들어준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익모초를 뜯어다가 씻고 또 씻은 다음 찧어 만든 쓴 익모초 즙을 마시지 않으려고 떼를 쓰기도 했었다.
남아선호사상에 찌든 유교집안의 5남매 중 외아들로 자랐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지만 내 행동은 제약(制約)을 받았다. 달 밝은 추석 무렵이면 청소년들이 동산의 모래밭에 모여 씨름판이 벌어지고, 그 함성이 집집마다 창문을 두드렸다. 초저녁잠이 많은 어머니가 잠을 못 이루고, 청년들 사이에 끼어 함께 즐기는 나를 슬며시 끌어당기면 안 가려고 떼를 썼다. 불어터진 입으로 방에 들어가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함성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어야만 했다. 가족들 몰래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고 오면 어떻게 아시는지, 나 때문에 죄(罪)없는 누나나 여동생들만 야단을 맞았다. 외아들의 설움이 나도 모르게 가슴에 멍울처럼 커 가고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채 한 달이 못되어 급성맹장염으로 밤새도록 앓다가, 고향 선배들의 도움으로 이튿날 이른 아침 어렵게 수술을 받았다. 사흘 뒤 어머니가 소복차림으로 입원실로 들어 오셨다. 나를 붙들고 우시면서
“너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사실이면 나도 금강에서 투신자살하려고 이렇게 소복차림으로 왔다.”
하시는 것이었다. 나만 믿고 사는 어머니의 슬픔이 내게 옮겨져서 나는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함께 울었다. 수술 직후 요금도 비싼 급전(急電)으로 집에 알렸으나, 이 전보가 면사무소에서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이장(里長) 일을 보시는 아저씨가 발견하여 집에 알렸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었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 하기야 우리 동네에서 급성맹장염으로 젊은이가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걸 상사병이라고들 했었다.
그 뒤 내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졌고 위축(蝟縮)되어 갔다. 헤엄에 자신이 있었던 내가 깊은 물에서 헤엄치다가도, ‘나 죽으면 어머니는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나와야만 했다. 막내 동생이 머시마로 태어나 이런 외아들의 설움을 스물세 살에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동생이 어느 회사의 중견간부가 되어 내 버팀목이 되고 있다.
나는 건강한 몸으로 아무 탈 없이 직장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에 친구들과 만나면 위암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으나, 내 튼튼한 위를 믿고 남의 이야기로만 들었다. 2002년 연말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나서 소화가 잘 안 되었다. 나도 이 기회에 위 내시경 검사를 받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소화기내과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아내에게 그때서야 사실을 이야기 하였더니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웬일이냐고 하였다. 웬만한 병으로는 병원에 가지 않던 내가,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고 하니 별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약 복용으로는 이상이 없었지만 보름 뒤에 L교수의 특진으로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진찰을 마친 교수님은 위에 약한 상처가 있는데 별 것은 아니겠지만, 조직 검사를 하려하니 일주일 후에 다시 나오라 하였다.
몹시 추웠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진찰결과를 보러 갔다. 교수님은 차트(chart)와 컴퓨터 화면을 보더니, 위암초기이니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아내와 자식들의 눈물이 나를 서럽게 울게 만들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국립위암센터에서 위암제거수술을 받았다. 1년에 두 차례씩 5년 동안 검진을 받았고, 올 봄에 마지막 검진에서 암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금은 종전과 같이 건강하고 친구들과도 술 한 잔씩 마실 수 있어 흐뭇하다.
안골복지회관에서 만나자는 사람이 있어 시내버스를 기다리다, 후진하는 차에 부딪혀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응급실로 달려온 자식들이 굵은 눈물로 나를 에워싸고 있어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첨단 의료장비인 M R I 검사에 이상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하였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으나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누워 있던 침대의 하얀 시트는 붉은 피로 얼룩졌고, 우측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정형외과 검사를 받아 발목에 기브스를 한 다음, 전주병원으로 옮겨 5주간의 치료를 받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먼 곳에 사는 형제들과 제자들, 찾아 주는 친지들이 많아 고마울 뿐이었다.
가해자는 119응급차를 불러 빨리 병원에 입원시켰고, 경찰에도 신고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가해자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보험에 맡겨 버린 가해자의 인간성과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에,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할 뿐이었다. ‘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형제들이나 자식들이 퇴원을 미루자고 하였지만, 보험회사와 합의를 해 주고 퇴원하였다.
이제 나는 앞으로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건전한 생각과 몸으로 여행도 하며, 틈틈이 글을 쓰려고 한다. 그렇게 살다가 하늘나라로 돌아 갈 때가 되면 짚불 꺼지듯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2008.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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