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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조윤수
ㆍ작성일	2010-02-07 (일)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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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면목
본래면목(本來面目)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조윤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이름은 그것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사람의 이름은 물론이고 모든 물상의 이름도 그렇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하여, 옛 사람들은 사람의 일생을 시기에 따라 부르기 좋고 의미 있는 이름을 지었다. 아명兒名이나 관명冠名과 아호雅號 등이 그것이다. 옛날에는 대가족제도였으니 집안 어른이 아이들이 태어나면 항렬에 맞추어 이름을 지었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는 항렬로 보아서 누구네 아이인 줄 알기 쉬웠다. 여자들의 경우는 시집을 가면 자신이 태어난 지방 이름을 붙여 택호로 불리거나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의 엄마로 불리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못했다. 나의 경우, 시댁 족보에 조(趙)씨 여식으로 올려졌으나 내 딸부터는 항렬에 맞는 이름을 지었고 족보에도 이름이 올랐다. 요즘 부모들도 아이들 이름을 짓는데 신경을 많이 쓴다. 순수한 우리말로 부르기 좋고 예쁜 한글로 짓는 것이 유행이다. 내 손주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였다. 현대의 작명소에서 항렬에 맞는 이름과 그렇지 않은 이름을 지었는데, 항렬 이름은 부르기가 좋지 않아서 다른 이름으로 택하였다.

서양에서는 주로 세례를 받으면 어울리는 성인들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받아서 이름의 격을 높인다. 19세기 미국 작가 체스터튼은 특별한 꿈이 있었다. 자신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면 인류가 백 개의 이름을 가지는 좀 더 높은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특별한 친구에게만 알려진 특별한 이름을 가진다. 거기엔 각양 각종의 사랑과 우정을 개별화하는 적지 않은 의식도 있다. 또 거기선 구혼자가 열 개의 이름을 통과하여 비로소 ‘영광’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숫자로 불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요즈음에는 이름 외에도 자기만의 아이디와 숫자도 챙겨야 하는 시대다. 조선 후기 문신인 김정희(金正喜)는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호가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김정희도 각별한 친구에게는 특별한 아호를 써서 우정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을까?

우리 5남매의 이름을 보면 우리나라의 시대배경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친정아버지의 생각과 마음도 읽을 수가 있다. 큰언니 이름은 아들 ‘자’를 쓰지 않았다. 둘째 언니와 나는 일제의 개명 시기에 태어났으니 ‘데스코 (자)를 써야 했다. 해방 후에 태어난 동생과 막내아들은 무궁화 근槿을 썼다. 아버지는 셋째인 나도 아들이 아니어서 대신 똑똑한 아들 같은 딸이 되어달라는 뜻으로 내 이름자를 빌어 원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밝을 ’철(哲)‘을 썼다. 그런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어려운 시기에도 유독 공부만 하려 한다는 어머니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오죽하면 전후 극심한 혼란기 때, 중학교 시험을 보러 가는 날 아침 집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세숫물을 퍼부으시며 ’시험에서 톡 떨어져라!“ 하셨을까. 나는 그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합격하였다. 학교시험에서 떨어져 본 일은 없었다.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은 학창 때까지 그 이름의 뜻을 잘 수행하였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자화상을 연상할 만큼의 여러 개의 이름이 내 내면의 역사에 흘러왔던 것 같다. 결혼 전까지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주로 'Miss Cho, 혹은 내 천주교 세례명인 'Anastasia'라 불리었다. 천주교 재단에서 영국인과 미국 신부님과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이름을 멋진 발음으로 노래하듯 부르곤 했다. 러시아 말로는 ‘나타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요가 사부였던 J선생은 나에게서는 대륙적 기질이 느껴진다고도 하였다.

결혼 날짜를 받으러 갔다. 내 이름을 말하니까 사주쟁이가 이름이 너무 세다 하여 고쳐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참을 인(忍) 자 세 개를 천정에 붙이고 살라는 충언까지 주었다. 그리하여 얻은 이름이 둥글 혹은 인륜 ‘윤(倫)과 빼어날 ’수(秀)‘이다. 시아버님께서는 흔쾌히 그 이름을 불러주셨다. 결혼식장에서부터 그 이름이 써졌다. 시아버님은 나를 항상 ’윤수야!‘ 하고 부르셨다. 우리 부부는 한 번도 서로 ’여보‘ 라고 부르지 않았다. 남편은 출타했다 들어올 때면 현관에서부터 ’윤! 윤!’ 하며 유난히 큰 목소리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전주로 시집 온 이래 내 이름은 당연히 그렇게 알려졌고, 후에 개명신고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 전에 취미로 문인화를 배웠었다. 그 때 서예 선생님이 지어주신 아호가 일하(一霞)이다. 압축한 이미지로 연심불수오(蓮心不受汚)란 큰 도장을 주셨다. 그 때부터 내 습작품의 낙관은 조(趙)일하(一霞)로 찍혔다. 또 내가 차(茶)일을 하게 되었을 때 내 차(茶)스승이신 비구니 스님은 다림(茶林)이란 다호(茶號)를 내려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문자가 있다면 이 차 다茶 자이다. 부를 때는 ‘다림화茶林華’다. 내 블로그 명을 이걸로 쓰고 있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차(茶)로 인하여 스님들과 교류가 많았다. 기독교 문화의 역기능으로 인한 염증이 느껴질 무렵 알게 된 불교문화는 심취할 만했다. 법문 또한 같은 진리를 설하는데도 신선함이 있었으며, 일목요연하게 사실을 말하고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선승들의 선문답은 흥미진진하고 가슴을 시원히 뚫는 맛이 있었다.

지금은 열반하신 청화 큰스님의 신실한 제자인 친구가 있었다. 기어코 나를 스님과 친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분이 나를 만나본 후에 대성주(旲星主) 라는 법명을 지어서 보내 주셨다. 나는 큰 ‘대’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자가 ‘빛날 대’여서 다행이었다. 부를 때는 큰 대로 알게 되니 그 친구는 나를 부를 때 ‘빛성주!’라 불렀다. 천진무구한 미소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었던 스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셋만 통하는 각별한 이름이었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처럼 나의 이름을 여러 모양과 빛깔로 불러주신 분들의 염원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말과 글도 다만 하나의 의미일 뿐, 의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말과 글 너머의 실상이 진짜 의미가 아닐까. 이름은 단지 시(示)명(名)이었으니 모든 사물의 이름에 매달리지 말라 했다. 이름은 단지 편리상 딱지처럼 붙여진 대명사에 불과하다. A로 불리어지건 Y로 불리어지건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진짜 이름은 변형될 수 없는 진짜의 얼굴이지 않을까. 본래 이름 없이 왔다 이름 하나 얻어서 결국 그 이름 놓아버려야 본래로 갈 터. 본래로 가는 징검다리가 아닌가. 오래 전, 요가 사부께서 내게 준 ‘화두’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었다. 그 면목을 구현(具顯)하는 일이 사는 것이련만…. 환상, 즉 이미지에 현혹되었던 많은 날들이 아깝다.

(2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