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푹 빠져버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밥 줘’ 라는 드라마인데 여느 일일연속극이 그러하듯 뻔한 스토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방송되는 30분 동안은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걸 보니 나도 아줌마가 되었다는 증거인가 보다.
드라마 내용도 재미있지만, 난 이 드라마의 주인공 중 한 명에게 흥미를 느꼈다. 내연녀로 나오는 여자인데, 이 여자는 ‘단기 기억 상실증’ 에 걸렸다. 남의 가정을 파탄시키는 악녀이지만 그 여자에게도 나름대로의 힘든 과거가 있었고, 현재도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려 하는 선택적 기억 상실증도 함께 겪는다. 잠이 들면 몽유병으로 이어져 황당한 행동을 하는 등 드라마의 전개에 흥미를 더해준다. 그러나 난 그것을 보면서 그 여자의 비도덕적인 행동에 분노하기보다는 사람의 ‘망각의 기능’ 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잊고 싶은 것보다는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사진조차 남지 않은 먼 기억의 일들과 얼굴들을 잊지 않으려 일부러 떠올려 보기도 하고, 일기에 써 보기도 했다.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어서 어렸을 때 사건이나 사람들 얼굴들을 잘 기억한다. 거짓말 같지만 20대 초반에만 해도 눈을 감으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아이들 자리 배치가 그대로 떠오르곤 했다. 첫째 줄은 영란이, 내 옆에는 현애가 앉았었지 하는 식으로 그때 옷차림이며 일들이 기억났다. 그래서 동창회에 갔을 때 누구보다도 친구들을 잘 기억해 냈다. 친구들은 아마도 일기를 열심히 썼던 아이라 그런가 보다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난 어느 때부턴가 내 뇌 속에서 ‘기억’보다는 ‘망각’하는 기능이 더 활발하게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컴퓨터처럼 아예 뇌 속을 ‘포맷’시켜버렸으면 할 때도 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한다. 망각의 기능이 없었더라면 사람의 뇌는 아마도 터져버렸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좋았던 기억은 영원히 간직해도 괜찮지만 가슴 아프고 잊고 싶은 일들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정말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저 ‘망각’이란 기능을 준 조물주에게 감사할 뿐이다.
얼마 전,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았는데 망각기능이 고장 난 여성이 출연했었다. 그 여인은 어렸을 때의 일도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3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잃었을 때 그 충격이 지금도 그대로 느껴져 하루하루가 그때처럼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했다. 그 여인은,
“여러분이 당연히 여기는 망각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실 거예요.”
라고 말했다. 그렇다. 정말 잊고 싶은 일을 겪었을 때 그 당시는 당장 죽을 것 같지만 ‘망각의 힘’이 있기에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망각의 힘’이 없었더라면 세상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렸거나 세상을 스스로 떠나 버리는 일도 많았을 것 같다.
나도 예전에 비해서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다. 누구보다 기억을 잘했던 나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아쉽진 않다. 다시 말하지만 왠지 ‘망각의 기능’이 내 뇌 속에서 더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픈 기억도, 즐거운 기억도 내 뇌 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그날그날에 충실하며 살고 싶다. 그냥 과거에 얽매어 살지 않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또 쓸데없는 기억을 많이 안고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뇌 속엔 3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묻혀버리고 사라졌을까? 그것을 컴퓨터 포맷시키듯 말끔히 지우려고 하는 건 나의 욕심일까? 그 나름대로, 현재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을 텐데 말이다.
‘망각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와 나누다가 엄마가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다.
“여자의 망각의 힘이 가장 발휘되는 일은 아기 낳을 때야. 낳을 땐 어찌나 아픈지 다시는 안 낳겠다고 생각하는데 지나면 잊어버리고 또 낳는다니까.”
하셨다. 글쎄, 앞으로 나도 언젠가 아이를 낳을 테니 이때는 망각의 기능이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아무튼 가벼운 드라마 한 편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의 뇌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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