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 일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조차 사람의 뜻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사람 일을 예측하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어느 시대 어떤 배경과 환경 속에서 태어나 살다 갔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학업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그 편에 속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들은 본인이 못 배운 한(恨)을 어떻게 해서든 자식에게는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써 자식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일종의 한풀이이고 대리 만족 같은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다른 부모와 다를 바 없었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곧바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일 년 간 집안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어린 나이에도 같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네 친구들이 중학교에 다니는 걸 보면 너무 부러웠었다. 나도 학교에 가고 싶었다.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다. 당시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통신강의록」이란 것을 우편으로 받아 공부했다. 그러던 가운데 다행이도 그 이듬해에 정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에 나는 장군도 되고 싶었고, 훌륭한 정치가도 되고 싶었으며, 유명한 문인도 되고 싶었다. 그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밤늦도록 호롱불과 씨름하며 지냈다. 그렇게도 꿈 많던 중학시절을 보냈으나 또다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번엔 중학교에 못가고 지낼 때와는 사뭇 사정이 달랐다. 농사일의 전면에 나서야 했다. 모내기, 벼 베기, 보리갈이, 지게등짐 등 농촌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면서 전업 농사꾼으로서의 실력(?)을 쌓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농촌에 묻히게 되는 것인가, 상급학교 진학은 요원(遼遠)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든지 돌파구를 찾자.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지 진학의 꿈을 이루자.’고 다짐하며 일했다.
그러던 1965년 시월 어느 날 밤, 중학교 때 공부하던 책 몇 권을 책보에 싸가지고 동네에서 막차 버스를 타고 집을 나왔다. 그날 밤 늦게 낯선 전주에 도착해서 두 달간의 고교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처럼 공부했으면 무엇이든지 못할 게 없었을 것 같다. 이상하게도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오지 않고 눈은 초롱초롱 빛났으며 정신은 맑았었다. 죽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잠을 청할 정도였다.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책과 씨름했다. 기거(起居)하는 곳은 창고를 방으로 만든 어설프기 짝이 없는 곳이어서 눈보라라도 칠 때면 방 천정 틈을 통하여 방바닥으로 눈이 들어왔다.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내게는 죽을 줄은 모르고 살길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번에 고등학교 입시에서 실패하면 나는 끝장이다. 더 이상 돌파구가 없다.’라는 비장한 각오로 책에게 매달렸다. 마침내 노력한 보람이 있어 목표했던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꿈에 그리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한창 취업률이 좋다는 공업고등학교를 목표로 했는데 용케도 합격한 것이다.
이렇게 끊일듯하면서도 가까스로 맥을 이어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초 공무원시험에 합격해서 공직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또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함으로써 학사학위라는 징검다리가 생겨 대학원도 다니게 되었다. 1994년 2월, 전북대학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을 때 논문 말미에 「벽돌 한 장을 쌓는 마음으로」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것을 하지 않고는 꼭 뭣을 잃을 것만 같은 갈급한 마음에서 자아를 갈고 다듬는다는 생각으로, 하마터면 이런 것도 모르고 일생을 마칠 뻔했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허겁지겁 이삭 줍는 학문을 이어왔지만 그때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씩 착실하게 쌓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라고.
이 글에서 밝힌 것처럼 이때 이미 나는 나 자신에게 또 다른 약속을 하고 있었다. 다시 벽돌 한 장을 올려놓기 위하여 수년간 기회를 엿보아 왔지만 쉽지가 않았다. 나이 쉰이 넘어서야 원광대학교에서 어렵게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나 여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 학기를 마치고 포기하겠다는 나를 끌어안고 설득을 해주신 지도교수님이 아니었더라면 나 자신에게 행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뻔했다. 제1․2외국어 시험의 관문, 엉성한 전문이론과 학식, 숙달되지 못한 반복되는 실험, 백여 편이 넘는 참고문헌의 고찰 등 실로 내게는 버겁기 그지없었다.
2003년 2월 20일 공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논문 말미에 「또 한 장의 벽돌을 쌓으면서」라는 제목으로 또다시 글을 실었다. ‘돌이켜 보면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이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제야 겨우 책 좀 볼 줄 알 것 같은 조심스런 생각에 양 어깨가 무거운 짐으로 저려옵니다. 그동안 허겁지겁 정신없이, 쉼 없이 이삭 줍는 심정으로 정진해온 학문에의 열정이 저를 지금 여기에 서있게 했습니다. 꼭 뭣을 해야겠다는 목표도 중요하고 결과도 중요하지만 저는 결과를 있게 한 「과정」을 더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과정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정당한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결과에 대하여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참으로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나 자신도 내가 여기까지 올 줄을 몰랐으니까 말이다. 다만, 인생의 곁가지 길을 외면하고 가능한 한 정도(正道)가 아니면 가지 않으려고 딴에 애썼을 뿐이다. 앞으로도, 벽돌은 계속 쌓을 것이며 여기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자세로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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