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마당에서 판소리 한 대목 불러달라는 청을 받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쾌히 승낙하고 말았다. 나의 가상한 용기에 놀라 막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프로필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어설프게나마 배운 판소리가 늘그막에 이렇게 나와 동행할 줄이야 꿈엔들 어찌 생각이나 했던가.
부엌일을 돕기 싫어했던 내게 어머니는 늘 도둑질만 빼고 다 배워 두면 언젠가는 쓸 데가 있다고 하시며 ‘아는 것이 힘이다.’란 말을 일깨워주셨다. 어머니의 강직했던 그 모습이 오늘따라 더 고맙게 여겨진다.
사실 프로필을 보내달란 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 따라 ‘나의 프로필’이란 말이 영 쑥스럽다.
여자들이 제복에 약하다지만, 독자나 관객 또한 프로필에도 약하다. 나 역시 그렇지 않았던가. 책이 배달되면 맨 먼저 책 표지를 훑어본다. 그리고는 표지 뒷면의 약력에 눈이 꽂혀 끝까지 내리 읽고는 화려하다느니, 대단하다느니, 때로는 별것 아닌 것처럼 폄하한 적도 있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여고를 막 졸업하고 취직하려고 처음으로 이력서를 쓴 적이 있었다. 그 뒤 평범한 주부로 40년이란 세월을 개미 쳇바퀴 돌듯 살아오다, 노을 녘에 전북도립국악원에서 겨우 더듬더듬 배운 판소리이거늘, 장려상은커녕 대회에 한 번 나간 경험도 없는 나의 약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평범한 삶이었지만 알뜰살뜰 잘 살았다고 적을까, 성가대장을 몇 년 했다고 적을까. 아니면 우등상, 개근상, 합창부 단장까지 했다고 적을까. 아무리 뒤적거려 봐도 주소와 전화번호밖엔 적을 게 없다. 마치 나를 간들거리는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면서, 지금까지 폄하해온 대가를 치르란 말인가. 평소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정에 휘감겨 부끄럼이 넘쳐 피식 웃음까지 나왔다.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쾌히 승낙을 하다니, 이 용기와 초라한 내 프로필에 한 풀 꺾인 감정은 도대체 어떤 라이벌일까. 우왕좌왕하는 꼴을 알 수가 없다.
드디어 잔칫날이 왔다. 찌르륵거리는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사회자의 소개. 고수의 약력은 정말 화려했다. 거기에 비하면 창자인 나의 프로필은 죄송하리만치 초라했다. 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고수님! 프로필을 몇 줄 저한테 넘겨주시지요!” 하며 농담을 청해봤다. 정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꾸어 오고 싶었다. 그러나 의기소침하지는 않았다. 내가 좀 부족하더라도 고수의 추임새와 화려함에 묻혀 가면 되니 말이다. 이가 부실하면 잇몸으로 씹으면 되듯이, 최선을 다하자. 쇼맨십을 발휘하자. 옷이라도 화려하게 입자. 얼굴에 항상 미소를 띠자. 틀려도 자신 있게 틀리자. 나름대로의 마음가짐을 단단히 먹고 임할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이 마음가짐은 어떤 처지에서든 변함이 없다.
악보도 없이 부채하나 달랑 들고 많은 사람 앞에 서서 맨 정신으로 신명나게 노래를 부른다는 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벌써 이런 공연을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크게는 전국수필의 날 수필가들 앞에서 깜짝 쇼를 했으며 작게는 50여 명도 못되는 노인복지회관까지 합하면 10회도 훨씬 넘었으니 이 또한 프로필 감인가.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쾌 이름난 명창과 같은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명창을 보는 순간 주눅이 들어, 오죽하면 집으로 전화를 걸어 기도 좀 해달라고 했을까.
무대 공포증은 적어도 나에겐 큰 적이다. 여기에 말려들면 달달 외웠던 가사도 꽉 막혀 쩔쩔매게 되니 말이다. 이것을 없애려고 염치를 부려보지만 잘 안 된다. 그러기에 내 나름대로 마음가짐을 주문처럼 외우기도 한다. 분위기에 취해 열창을 하다보면, 객석에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거나, 손장단을 치며 추임새를 맛깔스럽게 넣거나, 혹은 작은 슬픔이 녹아내려 즐거움으로 바뀐 것을 보면 그 이상 기분 좋을 수가 없다. 대형스크린에 비친 어르신들의 밝은 모습에서 참 행복을 찾곤 한다.
엊그제 공연에서도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오자, 명함을 내밀며 내 명함 한 장 달라고 했다. 이럴 때마다 명함 같은 것 없다고 대꾸하지만, 그 뒷맛 또한 개운치가 않다.
내 지갑 속에는 몇 푼의 지폐와 더불어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그리고 귀퉁이가 달아빠진 어느 여행사 명함에서부터 아들의 명함, 음식점, 어느 여스님의 명함까지 열대여섯 장의 명함으로 빵빵하다. 소중해서라기보다 그냥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전화연락 한 번 한 적도 없다.
글로벌 다문화시대에다 인터넷시대, 자격증시대 등등 ‘시대’란 말이 언제 적 유행어던가. 조석으로 급변하는 시대 속에 살면서도 빨리 적응 못하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가 바로 나다.
나의 프로필이다. 간단하지만 나에겐 더 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2004년부터 전북도립국악원에서 판소리 수업
2005년 컴퓨터교실 3개월 수업
2006년 9월 2학기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강
2007년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수필가 등단, <대한문학 제19호>
공연이 끝나고 나서, 모든 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해바라기 수필집을 꼭 넣어서 총천연색으로 그려진 아주 멋진 명함을 나누어 주고 싶다. 생각해보니, 프로필이란 그 사람의 삶에 무게다. 낙엽처럼 프로필 하나 떨어뜨리고 가는 것이 인생이려니 싶다.
(2009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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