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도 최고가로 선정된 ‘진풍명품’은 추사 김정희의 난액蘭額이었다. 난초 그림의 대명사라 불릴 수 있는 추사 김정희의 난화로는 독특하다. 그는 글씨의 정신과 그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비록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난초를 모두 잘 치지는 못한다. 화도畵道에 있어서 난초는 따로 한 격식을 갖추는 것이니, 가슴속에 서권기書卷氣가 있어야만 가히 붓을 댈 수 있느니라.” 라고 김정희는 말했다. 이는 심의心意를 존중하고 품격을 높이 보는 문인화의 묘미를 설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연마하지 않으면 어찌 고매한 선비의 학문과 사상과 정신이 깃든 난의 경지를 화폭에라도 옮길 수 있었으랴! 멀리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청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2009년도 최고가로 매김된 김정희의 난초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그려준 그림이며, 그 화제畵題에서 그와 같은 정신을 아들에게 남겨준 것이다.
몇 년 전에 만났던 청우晴友를 떠올린다. 전주에서 처음으로 란蘭산업박람회가 전주대학교에서 열린 날이었다. 그렇게 많은 난을 가까이 보기는 몇 십 년만이던가. 서울의 큰언니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다닐 때는 자주 난향을 취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내 큰형부는 선비다운 분이셨다. 그분의 서가에서 많은 책을 엿볼 수 있었고 난을 잘 가꾸셔서 귀한 난을 볼 수 있었다. 소심素心 류의 일경구화를 자주 보았던 것이다. 한 번 꽃을 피우면 난분을 지나칠 때면 그윽한 향기가 신비했었다. 형부를 따라 난 전시회에 가기도 했다. 그래서 난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도 되었다. 내가 시집올 때 난분의 족자를 시아버님께 보내드렸는데 아버님은 그것을 소중히 사랑방에 걸어두셨다. 내가 전주에 내려오니 강암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서 나를 부탁하시고는 잘 배우라고 하셨다.
벌써 삼십 수년이 지났으니 옛 벗을 잃어버리고 한 세월을 보낸 것 같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그대였다. 사군자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故友(오랜 벗),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寄友(진기한 벗)라 하였으며, 난을 방우芳友(꽃다운 벗), 국화를 일우一友(뛰어난 벗) 또는 가우佳友(아름다운 벗), 대나무를 청우晴友(맑은 벗)라 하고, 맑음과 고아함을 위하여 매, 죽을 쌍청, 추위를 견디는 인내를 취하여 梅, 竹, 松을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였다. 매죽, 난죽, 매국, 국죽, 세한삼우 등이 배합을 이루어 그림, 문양, 시 등에서 즐겨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연년세세 영구불변하는 우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조 높은 선비나 정절을 지키는 여인의 정신과 향기는 지닌 맛이 한결 같다. 날씨가 차가워진 다음에야 쓸쓸하게 보이는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서 오히려 따뜻한 온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애틋한 세한지정 때문일 것이다.
여러 종류의 난분이 서로 자태를 뽐내며 수많은 인파들의 시선에 몸살을 앓는 것 같았다. 고아하게 홀로 고귀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야 할 지체들이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사람들의 체취 때문에 난 향은 묘한 기운에 파묻히고 있었지만, 하나하나 꽃의 맵시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히 넘칠 만했다. 차茶 이름이 계절에 따라,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혹은 만든 사람에 따라 수없이 다른 이름으로 지어질 수 있듯이 난분의 이름도 그와 같은 것 같았다. 주로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 란의 홍화, 주금화, 복륜 등 소심 류의 꽃이 단아하고 은은한 빛이 더 매혹적이었다. 그 자태라니 가녀린 꽃대의 마디마디를 감싸고 있는 껍질은 우아한 조선의 여인이 모시 치마를 여민 듯했다. 긴 꽃대 끝에서 꽃송이의 매무새는 볼그레한 볼을 약간 수그리고 새침스런 얼굴이었다. 어찌 가슴이 절로 두근거리지 않았으랴.
난이 군자의 성품에 비유되니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이름을 남긴 선비와 가인들에 의하여 칭송되어 왔다. 난의 향과 고귀함에 관한 찬미는 기원전 공자 시대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있지만,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자서전적인 장편 서사시 <이소>에서 그가 난을 즐겨 넓은 지역에 가득 심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연관시킨 난초의 상징성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난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묵란화로는 조선 초 강세황의 <필란도>가 있고, 김정희를 비롯하여 이하응, 김응원, 민영익 등은 묵란화의 대가들이다. 난에 관한 시를 남긴 이로는 김부식, 김극기, 이규보,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이다. 현대에도 많은 문인들의 칭송이 이어지고 있다.
사군자를 계절 순서로 말하면, 매, 난, 국, 죽이지만 사군자화를 배울 때는 난, 국, 매, 죽의 순으로 한다. 난의 생김새가 한자와 닮은 점이 많아 서화동원書畵同原의 사상과 걸맞기 때문인 듯하다. 묵죽화가 직선미를, 묵매화가 굴곡미를 보여준다면 묵란화는 곡선미를 보여주는 수묵화이다. 문인화에 매료되어 서예를 좀 해봤지만 할수록 어렵고 무엇보다 한문에 막혔다. 한 가지 일에만 매진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문인화도 어려웠다. 사군자를 포함하여 소나무와 연화까지 그려보았지만 누더기 옷에 머무르고 말았다. 6군자까지 흉내를 내 보았지만 결국에는 난을 치기가 가장 어려웠다. 어느 경지까지 해보지도 못했지만 다시 해보려 해도 옛날 습작 수준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미련도 없어져서 해강 선생님의 난죽보蘭竹譜에 먼지만 쌓였다.
수 백 종류의 난이 전시되고 최고의 작품은 전시장 한가운데 따로 전시되어 그 값은 억대였다. 한 편에서는 작품을 놓고 경매가 한창이었다. 흔한 것은 한 뿌리 당 만 원부터 여러 질이 있었다. 그것이 귀하다 보니 매양 우러러지고, 값지다 보니 한결 부러워져 난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단골이 불어나는 지경이란다. 김정희의 난 정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집착증까지 보이는 현대산업의 장이었다.
“난초가 깊은 산 속에 나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향기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도를 닦는 데도 이와 같아서, 궁하다고 하여도 지절志節을 고치지 아니 하는 것이다.” 라고 공자는 말했다는데, 오늘날 유곡가인, 미인향, 군자향이란 난의 독특한 향기를 지닌 선비나 여인을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난초를 치는 데 손을 대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란 김정희의 깊은 충언을 새겨본다. 곧 우리 집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줄 야생춘란에서라도 나는 유곡가인幽谷佳人의 향을 그려본다. (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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