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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정석곤
ㆍ작성일	2010-01-23 (토)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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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가물가물하여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목요야간반 정석곤

어머니는 아흔한 살이시다. 나는 어머니를 닮은 것이 많지만 치아는 닮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랫니의 충치 두 개를 치료하고 금으로 덮어 씌우셨지만 서른두 개가 박속같다. 그 연세로는 건강하신 편이다. 그런데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기억력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모습에서 10년, 20년, 30년 뒤의 내 모습을 그려 본다.

노화는 먼저 시력에 오고 이어서 기억력에 온다고 한다. 내가 안경을 쓴 것은 20년이 훨씬 넘었으니까 40대 중반 때였다고 할까? 몇 년 전부터는 돋보기에다 근시와 난시를 보완하는 값비싼 다초점렌즈 안경을 끼고 있다. 그러나 이따금 깜박깜박하는 기억력은 수수방관해 왔다.

지난주에 내린 눈으로 빙판이 된 마을길은 녹았지만 아직도 응달에는 눈이 남아있다. 그 위에 아침부터 가끔 뿌린 진눈개비가 녹더니만 질컥질컥하여 더 미끄럽다. 사나운 바람이 옷깃을 헤집고 들어오는 저녁나절이었다. 우체국 계좌이체를 꼭 해야만 했다. 지난해 끝에 수리를 맡긴 작은 방 옥매트를 어제 늦게 가져왔는데, 수리비 45,000원을 오늘 주기로 약속했다. 농협통장과 우체국통장을 가지고 나가면서 생각이 났다. 우체국은 먼저 실행번호를 입력해야 하는데……. 나만 알도록 두 줄로 ‘58 25’라 메모된 통장 앞면 뒤쪽만 보고 대문을 나섰다. 학교 옆을 지나다 받을 사람 계좌번호가 생각나 그 이의 명함을 가져갔다.

덕진단위농협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현금을 인출하고 창구로 들어가 만 원 권 한 장을 천원 권으로 바꿨다. 덕진우체국으로 갔다. 먼저 현금자동입출금기에 현금을 입금하였다. 이제 계좌이체 차례라 실행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580025로 입력하고 비밀번호와 이체번호를 입력했다. ‘실행번호 오류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또 582115로 입력을 해보았다. 역시 ‘오류입니다.’라고 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들에게 미안했지만 대여섯 번이나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창구로 들어가 문의했지만 실행번호를 재발급 받아야 한다면서 ‘신분증’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나오면서 지갑을 빼놓고 그냥 온 것이다.

집으로 몇 걸음 오다 잠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교회 N권사님께서 먼저 인사를 하고 스쳐지나가셨다. 엉겁결에 인사만 받아 너무 죄송했다. 다음에 뵈면 사연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제야 그 실행번호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끝의 두 숫자 사이에 들어간 숫자가 틀린 거다. 빨리 가 이체를 시도했는데 ‘5회 이상 오류입력입니다.’라고 쪽지 밑에 씌어져 나왔다. 또 창구로 들어갔다. 이제야 실행번호를 알았는데 확인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내일 재발급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눈을 맞으며 집으로 들어왔더니, 아내는 조금 전에 수리비를 송금하였느냐고 전화가 와서 막 송금하러 갔다고 대했다지 않은가. 곧장 가서 똑 같은 번호로 재발급 받아 계좌이체를 했다. ‘국’이 오류라고 했지만 두 번째는 성공했다. 한바탕 소동을 부렸지만 기어코 약속을 지키고 나니 마음은 흐뭇했다.

우체국통장은 복잡하다고 혀를 끌끌 차면서 횡단보도 앞에 섰다. 사람모양의 녹색 신호 아래 30에서 하나씩 줄어드는 녹색숫자를 보면서 건넜다. 어느 금융시스템보다 고객의 안전을 위한 배려를 투덜대기도 했다. 나처럼 실행번호를 잊어버려 재발급해 주는데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력이 소모될 것이다. 나만해도 우체국통장을 몇 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세 번째나 재발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들은 공공생활을 비롯한 모든 생활이 법과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서로 도와주려는 자들을 위한 약속, 곧 나를 위한 약속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매사에 법과 규칙을 지켜야한다. 그래야 내가 자유스럽고 행복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내 희미한 기억력을 돌아보면서 조금은 침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억력의 감퇴를 막을 수는 없을까? 앞으로 내 나이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하나씩 늘어날수록 오늘 같은 일도 더 늘어날 텐데…….

지금 KBS-1 텔레비전에서 일일연속극 ‘다함께 차차차’를 방송하고 있다. 회장(한태수)은 고시에 합격하고 형 내외분과 아내와 해상여행 중 여객선 갑판에서 무서운 폭풍과 거센 파도에 휩쓸려 형은 죽고 자기는 실종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사고의 앞일은 송두리 채 잊어버렸다. 15년 만에 상실한 기억력을 되찾아 가족의 만남과 새 가족의 이별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다. 기억력은 노력한 만큼 회복된다는 자신감을 내 뇌에 각인시키고자 그 연속극을 자주 본다.

사람은 25세가 되면 신체의 모든 세포분열이 완성되고 그 뒤로는 뼈, 근육, 신경세포 등이 분화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부터 자기 몸에 맞는 운동을 하면 그 상태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내 나이에 운동을 해도 조금은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운동은 바로 잃어버린 기억력을 찾는데 보약이 될 수 있다니 안심이다.

‘9988234’가 신조어가 될 정도로 성인들이면 거의 알 것이다. 그걸 바라고 틈만 나면 운동하느라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다. 소득이 높아 갈수록 운동의 흐름도 달라진다. 연수 때 교양강좌 강사의 이야기처럼 ‘7330’을 구호로 정하고 한 주일에 세 번 씩 30분간 고강도 운동을 하면 어떨까? 내 수명대로 사는 날까지는 기억력이 초롱초롱하게 살고 싶다.

방송은 치매 예방에 계란 노른자가 좋다고 해서 몇 달 전부터는 계란을 자주 먹는다. 그런데 어느 건강책자를 보면 ‘코레스톨’의 최고 수치는 계란 노른자가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고혈압과 비만이 걱정되지만 혈압 약을 복용하니까 계란을 하루에 한 개 쯤 먹는 것도 괜찮으려니 싶다.

(주) 다초점렌즈 : 눈의 곡률(曲率)에 따른 입체적 설계를 시도하여 돋보기 부위의 경계가 없고 도수의 변화가 렌즈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이어 서 먼 거리와 중간거리, 가까운 거리를 자연스럽고 안정되게 볼 수 있게 해 주는 최첨단 안경렌즈
권사(勸士) : 기독교의 전도 사업을 맡아 보는 교직(敎職)의 하나 또는 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