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상권
ㆍ작성일	2009-06-17 (수)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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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곳
생각하는 곳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김상권

어제 고사동 어느 B돌솥밥집에서 부부모임이 있었다. 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화장실 출입문에 ‛생각하는 곳’이란 표지판이 붙어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곳’이라니, 생소했지만 신선하고 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일을 보면서 잠깐이나마 자신을 생각해보라는 뜻이 아닐까하고.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서는 지금의 화장실을 뒷간이나 측간, 칙간이라 불렀다. 옛날 내가 살던 고향집은 안채가 있고 그 옆에 사랑채가 있었다. 사랑채는 부엌과 방, 헛간 옆에 뒷간이 있었다. 뒷간은 큰 항아리를 묻어놓고 그 위에 두 개의 나무판을 걸쳐놓아 용변(用便)을 볼 수 있게 했다. 뒷간은 뒤를 보는 공간만이 아니라 볏짚을 태운 재를 모아두는 곳이기도 했다. 인분(人糞)과 재는 훌륭한 거름이다. 이처럼 뒷간은 단순히 뒤를 보는 장소만은 아니었다. 화학비료가 지금처럼 대량 보급되기 전에는 가장 귀한 천연거름을 생산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는 속담도 있다. 이는 뒷간이 가까우면 냄새가 나기 때문이고 사돈집이 가가우면 말썽의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뒷간은 대개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었다. 그런데 뒷간이 멀다보니 불편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중이나 비가 오는 날, 몹시 추은 날이면 뒷간 가기가 여간 고역스러운 게 아니었다. 특히 밤중에는 뒷간 귀신이 나온다는 말도 있었으니 더욱 뒷간 가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잠자는 형이나 어머니를 깨워 망을 보게 하고 볼일을 본 일도 있었다. 소변일 경우는 방안에 요강이라는 게 있어 별 문제는 없었다.
한 달 전에 남원 실상사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화장실을 ‘생태 뒷간’이란 푯말아래 ←선녀 , 선남→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앞에는 “뒷간은 농약과 화학비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생명의 먹을거리를 키워내는 소중한 거름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는 안내문도 있었다.
사찰의 화장실은 대개 ‘해우소(解憂所’)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순천의 선암사는 ‘깐뒤’라 씌어 있었다. 이 사찰에서는 화장실을 ‘깐뒤’라고 하나보다 생각하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소변을 본 일이 있었다. 거꾸로 읽어보고 피식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뒷간이란 말 대신 변소라고 불렀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여전히 뒷간이라 불렀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내가 중․고등학교 때나 군대시절, 교사시절까지도 화장실은 인분을 퍼내는 변소였다. 물론 역이나 버스 정류장 등의 공중변소도 마찬가지였다.
역이나 버스 정류장, 고속터미널 등의 공공장소에는 공중변소가 있기 마련인데 그곳이 너무 불결했었다. 그래서 변소청소를 위해 한때는 돈을 주고 용변을 본때도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별채에 있던 변소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변소가 화장실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다. 지금은 변소라는 표지판도 없고 변소라는 말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문명의 발달에 따라 말도 바뀌게 마련인가보다.
깨끗한 화장실이 좋긴 하다. 그러나 나는 옛날 뒷간 시절이 그립다. 그때의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의 모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옛 추억에 잠겨보기도 한다. 비록 냄새가 나는 뒷간일지라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십 수 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화장실문화는 크게 바뀌었다. 시골은 물론 도시의 단독주태이나 아파트 할 것 없이 모두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학교, 관공서, 공공시설, 고속버스 휴게소 등도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화장실문화가 된 것이다.
화장실 명칭의 변화는 사실 우리 삶의 변천사라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농경사회의 뒷간에서, 공업사회의 변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의 화장실로 이름이 바뀌면서 우리 생활도 빠르게 변했다.
나는 몇 년 전에 외국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 큐슈의 후쿠오카공항이나 중국 장사 공항, 홍콩 책랍콕 공항의 화장실을 보았다. 내가 본 그들 나라의 화장실보다 인천공항의 화장실이 너무도 아늑하고 깨끗했다. 어깨가 으슥해지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화장실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사실 화장실 표기는 어쩐지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화장실이란 17~19세기 영국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화장실은 영어로 표기하면 W.C라고도 한다. 이는Water Colset의 약자로 수세식 변소라는 뜻이다. Toilet은 보통 변소를 말하며, Restroom은 휴게실이 딸린 화장실을 의미한다.
우리의 정서와 맞는 한 차원 높은 이름을 지으면 어떨까. ‘생각하는 곳’을 줄여서 ‘생각방’ 아니면 ‘세심방(洗心房)’은 어떨까? 그게 아니라면 우리 정서에 맞는 좋은 이름은 없을까? 현상공모라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20009.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