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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신기정
ㆍ작성일	2009-04-15 (수)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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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고 살기
비우고 살기
행촌수필문학회 신기정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고시생 시절, 온종일 책과 씨름하는 일상에 넌더리가 날 때마다 떠올리던 그림이 있었다. 하얀 무명시트가 깔린 병원침대에서 지겹도록 뒹굴어보는 것이었다. 튼실한 몸을 주신 부모님 덕에 몇 번 기회를 놓치다가 마침내 이룬 2박 3일의 꿈! 그 주역은 나의 방귀담당 배기관이었다. 주인이 시간적 여유가 생겼음을 먼저 아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었다. 25년만의 캠퍼스생활에 마음이 들떠 있을 초봄 무렵, 녀석은 그렇게 최후의 통첩을 보내왔다. 사실 이전에도 몇 번 때 아닌 벚꽃을 피워 신호를 보냈지만 며칠 조심하면 되는 일회성 경고쯤으로 무시했었다. 여기에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찍소리도 안하는 녀석의 인내심 탓도 크다. 그러나 이번에는 계속되는 적색경보에 아예 영구퇴장을 당할 것 같은 위기감으로 급히 병원을 찾아 고치기로 했다.

수술일 새벽, 억지로 속을 비우는 작은 고역을 치르며 문득 주인을 잘못만나 고생하는 녀석에게 측은함이 느껴졌다. 돌이켜보니 녀석의 운명도 참 기구했다. 입과 비교해보니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입이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아도 녀석에게 돌아가는 것은 항상 폐기물뿐이었다. 그것도 거름이 귀한 시절에야 채마밭에 요긴하게 사용했지만, 요즘이야 요행을 바라는 이들의 꿈속에서나 반가울 뿐 쓸모없는 천덕꾸러기가 아닌가. 그 오랜 세월동안 다들 외면하는 오물을 걸러 내보내면서도 군소리 없이 이만큼 버텨 준 것이 여간 고맙고 기특한 게 아니었다.

녀석의 기구한 운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주변 볼기짝이 이유 없이 매를 맞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퇴화된 꼬리뼈를 떠받치고 괄약근을 바짝 조여 온 몸을 지탱해도 평생 햇볕구경도 힘들었다. 그나마 세상구경이라는 것도 아픈 주사를 맞거나 죄지은 주인을 대신해 곤장을 맞을 때가 고작이었다. 식성이 까다로운 주인을 만나면 변비로 고생하고, 항상 재잘대는 입이 부러워 가스의 힘을 빌려 한마디라도 하렸다가는 주변이 온통 난리가 났다. 종이가 귀한 시절의 까칠한 호박잎과 잉크가 묻어나는 꾸깃꾸깃한 신문지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을 것이다. 그나마 요즘엔 비데라는 것으로 가끔 목욕이라도 시켜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리 고생을 하는데도 어떻게 녀석이 호박씨를 깔 수 있다고 의심하며, 칭찬은 못해줄망정 장난삼아 똥침까지 놓는 것인지…….

미추마취의 통증은 치부를 드러내는 부끄러움마저 잊게 만드는 묘약이었다. 한 시간 정도 감별사의 손에 엉덩이를 까발린 병아리 신세가 끝나자 녀석의 소심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수시로 이어지는 통증은 혼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녀석이 벌써 주인을 용서한 듯 상처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녀석은 아쉬울 때만 신경을 쓰는 못 믿을 주인에게 이번엔 확실한 다짐을 받고 싶었나보다. 12일째 되는 날, 다시 중환자의 행색으로 병원신세를 져야만했다.

그새를 못 참는 방정맞은 입의 식탐이 문제였다. 수술 뒤 5일정도 음식을 반으로 줄이고 그 뒤 조금씩 양을 늘렸었다. 다행히 특별한 변의(便意)도 없어 녀석이 소화기관들에게 음식을 완전히 소화하도록 협조를 구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인체의 장기는 뇌의 지시만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 기억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번엔 대장이 수술부위의 고통을 생각해서 무식하게 참으며 저장고 역할을 자원했던 것이다. 허리통증을 호소하는 나에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의사는 복부 X선 사진을 보고서야 허탈한 듯 웃었다. 그리고 꼬박 이틀 동안 가득 찬 덩어리들을 비우기 위해 눈앞에 샛노란 별들이 수없이 오가는 의식을 치러야 했다.

비우는 순간의 고통은 컸지만 그 뒤는 흥겨운 휘파람이 저절로 나오는 쾌감이 따랐다. 덤으로 지지부진하던 수술상처까지 더 빨리 아물었다. 모두 다 비움으로써 얻은 보상이었다. 우리 역사상 비움의 미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이다. 그들은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않으며, 만 석이 넘는 부분은 사회에 환원하였다. 또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않으며,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 이런 비움과 나눔의 실천이 있어 최부자집은 3대도 지탱하기 힘들다는 부를 300년 이상 이어온 것이다. 이외에도 홍수 때 저수지의 붕괴를 막는 무넘기와 잎자루가 버틸 수 없는 물을 스스로 비우는 연잎의 지혜도 또 다른 모습의 비움이다.

오래 사는 동물들은 하나같이 포만감을 느끼기보다 약간 부족하게 먹는다고 한다. 정량보다 약간 적은 수준이 활동하기 편하고 건강에도 좋다는 이야기다. 또 세상 누구도 버티지 못하는 유일한 고문은 쉴 틈 없이 계속 음식물을 먹게 하는 것이라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마저 힘을 다하면 죽음보다 더한 고문으로 바뀌는 것이다. 인간욕심의 무한성에 근거하여 평생 손해는 안보고 살려는 이들이 꼭 새겨볼 일이다. 몸처럼 우리의 마음도 한계를 알고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일인가? 돈 욕심 탓에 평생 쌓아온 명예와 신뢰들이 한순간에 매장되는 사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욕심 없이 살며, 나눔 천사들이 전하는 ‘비운 만큼 더 채워진다.’는 기적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2009.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