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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김효순
ㆍ작성일	2010-03-19 (금)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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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무 소 유
전북대학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효순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지니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옷장 안의 묵은 옷들을 내다 버리면서 염불하듯 그 의미를 자꾸 되새겨 본다. 버려야하는 것이 어디 유형의 물건들뿐이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눈 한 번 찔끔 감은 채 뒤돌아서면 오히려 쉽게 잊을 수 있지만, 마음에 새겨진 문신은 하얀 교복에 묻었던 잉크 자국 같았다.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문질러 햇빛에 널면 없어진 듯 보이다가 물에 담그면 그 자국이 다시 선명해지곤 하던 그 자국.
지금이야 흙 묻은 신발을 구경하기도 힘들 만큼 고향 길도 다 포장이 되었지만 내가 초ㆍ중등 학생이던 시절에는 읍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제외하면‘비만 오면 각시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같은 길을 걷는데도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유난히 내 바짓가랑이에는 흙이 많이 달라붙었던 걸 보면 지금이나 그때나 조신한 성격은 아닌 듯하다. 그런 나는 친구도 마음 가는 대로 사귀었다.
지금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것을 그다지 우러러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범생이’라며 질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 어릴 적에는 공부 잘하는 것은 학생이 지녀야 할 최고 인기 덕목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군 학력경시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기도 할 만큼 학교 성적으로만 치면 이른바 모범생에 속하였다. 성격 또한 밝은 편이어서 여러 유형의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공부보다는 예능에 소질이 많고 연애에도 일가견이 있는 친구 덕분에 여고시절에 ‘미팅'을 해본 경험도 있다. 이러다 보니 귀가 시간은 늦어지게 마련이었고, 그때마다 엄마에게 야단맞기 일쑤였지만 그렇다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몰려다니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사귄 친구들은 모두 나를 좋아한다고 믿고 지금껏 살아왔다. 내 마음속에 그들에 대한 그늘이 없었으므로 그들 또한 나에 대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오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던가. 이 나이에 느닷없이 내 뒤통수를 때리면서 등 뒤에서 나타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눈이 앞에 달렸기 때문에 등 뒤에서 공격해 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그들에게 맞아서 어지러운 증상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내가 잔칫상을 차리고 있을 때는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면서 잘 차려 맛있게 먹으라고 격려까지 해주던 K가 막상 차려진 음식을 보더니 탐욕을 부렸다. 그 잔칫상 앞에 앉아서 숟가락을 들려는 순간, K가 고용한 힘센 양아치가 달려들어 내 팔을 비틀더니 숟가락을 뺏어가 버렸다. 다행히 K의 이 배신행위에 대해 나보다 더 분개하면서 나대신 응징해주던 언니 같은 친구 S의 도움으로 나는 새로운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K에 대한 울분으로 들끓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우아한 자태를 유지할 수도 있었다.
K같은 인간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내게는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되어주는 S가 있기에 그까짓 아픔쯤은 감내할 수도 있었다. 이 씁쓸한 사바세계에서 마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한 사람만 가지고 있으면 감기처럼 찾아온다는‘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한다. S는 내가 하늘의 달을 따다 달라고 조르면 긴 막대기를 들고 나무 위에 올라가 달 따는 흉내라도 낼 친구다.
그런 S를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벽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기댄 것은 나의 어리석은 집착이었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S가 농담처럼 나를 ‘멍순이'라고 불렀다. 눈치가 없다는 말이다. 아둔한 내가 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S는 변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내가‘논을 샀을 때’함께 기뻐해주던 그 옛날의 친구가 아니라 이미 '배 아파하는 사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학 시간강사였던 남편이 제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안정되는 내 삶에 비해 S의 사업은 점차 하향곡선을 그리는가 하면 가정사도 불안정해졌다. 그러자 그동안 자기가 베풀었다고 생각된 것들이 되돌아오기를 기대했겠지만 그게 어디 가당한 일이었겠는가. 해마다 논을 늘려가는 내 모습에‘배 아픈 사촌'이 된 S는 친구이자 철없는 동생처럼 여기던 나를 시샘하는 자기 자신을 용납하기가 더 힘이 들었는지 내 앞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녀가 나와 통하는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눈보라가 몹시 치던 겨울밤, 어렵게 찾아간 내가 문 열라고 문밖에서 한 시간 동안이나 애원했는데도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현관 쪽에 붙은 목욕탕 하수구로 흘려보내는 물소리만 요란했다. 벌써 두 해 전의 일이지만 지금껏 나는 S가 닫아버린 문밖에서 주인 떠난 빈집이 되어 서 있다.
아직은 바람결에도 꽃소식이 들리지 않는 날인데 정체 모를 향내가 코끝을 스친다. 두리번거려 찾아보니 꽝꽝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 볼품없는 못난이 회양목 꽃에서 풍기는 향내였다. 나보다 먼저 그 꽃향기에 취한 벌들이 윙윙거렸다. 홀로 있는 매화의 안부가 궁금해서 해마다 이맘때면 ‘불일암'에 들르신다는 법정스님이 매화에게 다정하게 인사하시던 모습을 흉내내본다. 키 작은 회양목에게 무릎을 구부리고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얘야, 네 향기가 참 곱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