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공순혜
ㆍ작성일	2010-03-18 (목) 06:50

ㆍ추천: 0 ㆍ조회: 2842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목요반 공순혜

‘대길’이는 오늘도 언년이의 초상화를 가슴에 품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마을 곳곳을 뒤지고 다닌다. 언년이는 그에게 누구인가? 집안과 자신을 패가망신(敗家亡身)시키고 그를 그렇게 추하고 악하게 만든 자기 집의 노비가 아니던가. 사랑에 눈이 멀면 신분이 비천하고 밉거나 고와도 상관이 없다.
‘대길’이의 사랑은 지극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언년이에 대한 사랑만으로 죽음의 공포도 잊고 자기 몸을 던져 마지막 희생을 바치고자 한다. 참 허무한 불행이다.
사랑은 영원하지 못하다. 언년이도 ‘대길’이를 잊지 못하지만 ‘송태하’를 만나서 그의 아내가 된다. ‘대길’이를 만나지 못해 그렇게 되었다지만 만났던들 또 어떤 이유ㄹ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KBS 드라마 ‘추노’를 보면서 사랑과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남자들의 권력에 대한 야망의 세계, 추노꾼들의 의리와 험난하고 섬뜩한 칼부림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보고 있다.

강원도 춘천의 오봉산 청평사 계곡에는 공주의 몸을 감고 있는 뱀 청동상이 서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아득한 산봉들을 마주한 능선에 강원도 기념물 55호인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에는 당나라 평양공주와 상사뱀에 얽힌 슬픈 전설이 있다. 사랑에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도 없는 모양이다. 살아있는 것은 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인가 보다.

구두를 만드는 가게 직공 ‘미하일’ 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딱 세 번 웃었다. 첫 번째는 가게 주인 세묜의 아내 마뜨료나가 그를 위해 저녁식사 준비를 하던 첫 만남의 순간이었고, 두 번째는 키가 크고 거대한 몸집의 모피 외투를 입은 점잖은 신사가 좋은 가죽을 가지고 와서 일 년을 신어도 찢어지지 않고 모양이 찌그러지지 않는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그 신사를 유심히 살펴본 뒤 갑자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슬리퍼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인 세묜은 나를 감옥에 보내려고 작정했느냐며 화를 내는데 신사와 같이 왔던 하인이 급히 달려와 주인인 신사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마차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주인마님이 죽은 사람에게 신길 슬리퍼를 만들어오라고 이 하인을 급히 보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숙한 차림을 한 여인이 두 쌍둥이 여자아이들의 구두를 맞추러 왔을 때 두 손을 무릎에 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주인 세묜 부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미하일’은 원래 천사였는데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벌을 받아 땅으로 내려와 비참하게 살았던 것이다.
‘미하일’은 첫 번째 웃을 때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두 번째 웃음에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은 자기에게 곧 닥쳐올 일이 무엇인지 몰라 진정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 웃음에는 쌍둥이들이 자기 어머니가 없어도 착한 천사 같은 여인을 만나 잘 자란 것을 보았을 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긴 이야기는 1992년 4월 우리나라에서는 초판이 출간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 중 한 편의 이야기다. 색이 누렇게 변하고 글자는 작은 인쇄체 글씨인 이 책을 나는 옆에 두고 마음이 우울하고 심란(心亂)할 때 한 편씩 읽어보면 위로가 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늘밤 며느리 희정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느냐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수술해야 된다며 태연하게 말했다. 저번 서울에서 건강검진 때 어떤 장기(臟器)에 이상 징후가 있으니 정밀검사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여기 대학병원에 가서 심층혈액검사와 CT촬영을 했는데 오늘 검사결과를 보러 오라고 했다. 검사하기 전 의사는 수술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이들은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했고 오늘을 기다리느라 애를 쓴 모양이다.
검사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희정이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양치기 소년의 장난 끼와 시어머니의 고약한 심성이 발동하여 그렇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희정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외국 학회에 나간 제 남편에게 지금 알려야 할까 오면 알려야할까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내가 심한 것 같아 아들이 학회도 끝내지 않고 달려올 것만 같아 불안했다. 한참이 지나서 희정이에게 전화를 했다.
"희정아, 사실은 아무 이상 없대! 괜히 내가 너한테 심통스럽게 거짓말을 했어. 미안해."하고 실토를 했다. 희정이는 울먹이며 "어머니, 감사합니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다시 전화를 해 주셔서요. 어머니는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어머니에 대해 미련이 많아요. 아직도 여권을 두 번은 더 갱신하셔야 해요." 하며 웃음기를 머금고 대답을 했다.
저번 여권 갱신 때 차가 없는 나는 도청까지 가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이제는 내 생전 여권 때문에 도청에 갈 일은 없겠다며 좋아했던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정이 되었는데 희정이는 그때까지 저녁식사도 하지 않고 울고 있었다.
감사와 감동과 감격으로 멍멍해진 내 가슴에 뜨거운 액체가 흥건히 고여 왔다. 남의 어머니와 남의 딸로 만나 한 가족이 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를 생각했다. 앞마당에 꽃봉오리를 맺은 동백나무가 내일 아침에는 따뜻한 햇살을 받아 활짝 선홍색 꽃을 피우기를 바라며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201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