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존경하는 K작가님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카페에 올라가 있는 내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적어서 보낸 편지였다. 더구나 자필로 쓴 편지라서 더 감동적이었고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자필로 쓴 편지를 받아본 적은 아마 20년이 더 넘는 것 같다. 물론 써 본 일도 없다.
마지막 편지를 받아본 것은 동생이 육필로 써 보낸 편지였다. 그때 나는 동생의 편지를 읽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동생이 공부를 그만둬야 하는 서러움을 토해낸 편지였다. 장남인 나의 잘못이 크다는 생각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동생이 좋아하는 연극생활을 최선을 다해서 도왔고, 결국 동생은 전라북도연극협회장까지 맡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 편지에 있던 글자 한 자 한 자가 동생의 얼굴처럼 가슴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휴대전화가 나오고, 문자서비스와 전자우편이 등장하면서 편지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꿈동산이 사라졌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듯이. 그러나 편지에는 문자나 전자우편이 주지 못하는 감동과 호소력이 있다. 편지를 쓸 때의 진솔함과 간절함, 무엇보다 따뜻한 인간의 정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요즘은 흔한 우편엽서마저도 보기 힘들고, 겨우 배달되는 것은 청첩장과 고지서, 관공서에서 가끔 보내는 홍보물이 고작이다. 쉽고 빠르고 간편한 것만 쫓아 사는 세상이 야속하다.
지난 4일(2010.3.4) 미국 ABC방송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연애편지가 경매시장에서 1억 3천만 원에 낙찰됐다고 보도했다. 케네디의 연인이었던 스웨덴 여성 구닐라 폰 포스트 씨가 50여년을 은밀히 간직해온 것을 공개했는데, 11장의 편지와 3통의 전보에는 애절하고도 열정적이었던 당시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뜨거운 내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오늘 급히 할 말이 있소. 내 부인과 여동생이 이리로 온다고 하오. 감정이 복잡하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저 당신이 있는 바다 쪽을 바라보며 당신을 생각하는 것뿐이오.”
라는 사연도 있다. 병원에서 보낸 편지에는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두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병원에 있어요. 유럽에 갈 수 없었던 것이 매우 속상해요. 더구나 당신이 파리에 있어서, 우리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36세의 케네디가 21살의 금발미녀 포스트 양을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의 한 휴양지, 재클린과 결혼하기 전 상원시절이었다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재클린과 결혼한 뒤에도 계속됐다고 한다. 바람기가 많은 케네디였지만 전화 대신 편지를 주고받았다니 역시 케네디는 멋있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고, 암살당하는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케네디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이제야 연애편지를 공개한 78세 포스트 씨의 애절한 삶도 멋져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케네디보다 더 뜨겁고, 구구절절이 애절하고 감동적인 사랑의 편지들을 마음에 담고 있다. 지금까지 수십 통의 편지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연애편지를 썼다. 여자는 1년 후배였는데, 나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당시는 규격봉투가 아닌 편지도 배달이 되었다. 그래서 손바닥에 들어갈 정도로 작고 귀여운 봉투를 직접 만들어 편지를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한번은 우체부 아저씨(지금의 집배원)가 주머니에서 꺼내주기도 했었다. 우체부 아저씨만 봐도 반가웠던 시절!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도 어니언스가 부른 ‘편지’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고 난 그만 울어버렸네~♬
편지는 그리움의 상징이다. 전화가 없던 시절, 멀리 있어 만날 수 없었던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편지뿐이었다. 밤늦도록 쓰고 찢고 다시 쓰고, 마지막으로 봉투에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넣을 때는 마치 기도하는 소녀의 마음 같은 순수함과 소망도 같이 보냈다.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 애틋했다. 우체부 아저씨가 올 시간이면 아예 대문 밖에서 기다릴 때도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펜팔 편지를 쓸 때는 더 긴장되고 설렘이 있었다. 많은 청춘들이 이렇게 편지로 정이 들고, 어느 날 낯선 고장, 공공건물 앞에서 만나, 서로의 그리움을 확인하고 결혼까지 한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친구의 부탁으로 두세 번 펜팔 편지를 써준 일이 있다. 편지를 보낸 여성한테 답장이 오면 빵을 사준다고 해서 여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써야만 했다. 그래서 서점에 가서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좋은 구절이 있으면 적어 오기도 했었다. 그리고 답장이 왔을 때는 합격통지서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하고 자랑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빨간 우체통을 보기가 어렵다. 우체국에서 주로 하는 업무도 편지대신 택배나 인쇄물을 배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도 은은한 연분홍색 편지지가 있을까? 요즘은 어떤 우표가 있고, 우표 값은 얼마나 될까? 갑자기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고도원의 아침편지'처럼, 오늘은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에게 편지 한 통씩을 쓰는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모님에게 보내는 안부의 편지도 좋고, 도움을 받은 분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도 좋겠다. 아니 연인에게 쓰는 연애편지면 더 좋겠다. 나는 오랫동안 연락을 못한 대구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에게 우정의 편지를 써야겠다. 편지 속에는 고향냄새를 맡으라고 솔잎 하나와 최근에 핀 춘란 꽃잎 하나를 같이 넣어야겠다. 그리고 우체국에 찾아가 직접 편지를 부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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