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친구가족과 함께 청람 빛 바닷물과 해넘이를 보고자 부안 격포를 찾았다. 낮에 맑던 하늘이 저녁노을이 되자 얄궂은 구름에 덮여 아쉬움만 남기고, 그날 밤은 바닷가를 거닐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내친 김에 고창 선운사 꽃무릇(彼岸花)을 찾기로 했다. 낯 선 곳은 아니었으나 모처럼 꽃무릇을 보니 46년 전 그때의 일들이 가슴인가 머리인가를 흔들었다. 여기엔 내 친구의 사랑과 넋이 재가 되어 뿌려진 꽃무릇 동산이 있기 때문이다. 한 쌍 연인의 토혈을 거름삼아 재가 되고 흙이 되어 붉은 상사화를 피웠나?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교사로 복직하여 정읍에서 근무할 즈음, 죽마고우였으나 10여 년을 만나보지 못했던 친구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동안 사범학교 대신 교육대학이 신설되자 늦깎이로 입학하고 졸업하여, 초임으로 고창 무장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으니 주말에 얼굴 좀 보자는 전갈이었다. 벅찬 가슴을 안고 토요일 점심도 거르며 뿌연 먼지를 일으키는 완행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기다리는 친구를 찾았다. 그때의 감회를 어떻게 표현할까?
그와 나는 둘이서 초등학교 6년간 급장을 도맡아 했고 전교회장도 한 학기씩 나누어 맡았는데 졸업과 동시에 헤어졌다. 중․고등학교 생활 그리고 군대 생활을 거치는 동안 서로 소식만 들었지 만나질 못하다가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간 10년간의 이야기 보따리에 밤새는 줄 몰랐다. 더욱이 꿈에도 생각 못했던 교직에 같이 몸담게 될 줄이야, 그날 밤을 지새고 이튿날 좋아하는 술과 풍천장어를 맛보자며 선운사로 향했다.
오월의 산야는 푸르름이 더해가고 파란 잎 속에 빨간 동백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산사를 거닐다가 문득 한 곳에 멈춰 서더니 하늘을 응시하다가 눈물을 닦는 게 아닌가? 그때는 이름 모를 몇 그루의 풀만 여기저기 나 있었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사연을 묻게 되었다. 말하기 어려워하는 친구를 졸라 그의 애절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교대에 입학해 1학년을 마칠 무렵 백옥같이 고운 얼굴의 소녀를 만나게 되었단다. 그녀를 마음속에 그리워하면서도 사랑을 고백할 기회도 없이 가슴만 태웠단다. 여러 번 시도 끝에 용기를 내어 접근하였고, 몇 번 만나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더란다. 어찌 그리도 빨리 몇 달이 지나 졸업이 가까워졌을 때, 말 한마디 없이 소녀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단다. 기다림에 지친 몇 달, 백방으로 수소문했더니 지병으로 어딘가 요양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곳 고창으로 초임발령을 받고, 학교 숙직실에 짐을 푼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하늘의 도움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어느 여인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단다. 몸과 마음을 구름에 얹혀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단다. 그녀가 선운사 도솔암에서 요양 중이라는 귀띔이었단다.
뛸 듯이 기뻐서 한 걸음에 쫓아가니, 그녀가 해맑은 미소와 눈물로 반기며 고창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요양지를 도솔암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하더란다. 반가워서 와락 껴안고 싶었지만 초췌한 그녀의 가냘픈 모습에 두 손만 꽉 잡고 얼굴만 바라보았단다. 소녀는 몇 년 전부터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졸업 직전 병세가 악화되어 수덕사에서 요양하고 있다가 친구가 고창으로 발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 도솔암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다. 두 손을 놓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 토혈을 하자 멀리서 지켜보던 여자 간병인이 황급히 쫓아와 부축하여 돌아가고 말았단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만났으나, 항상 아쉬움만 남기고 헤어졌다. 학기 초라 바빠서 두어 달 쯤 지난 뒤 그녀를 찾았으나, 그녀는 영영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10여일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최 선생께 알리지 말고 화장하여 여기 선운사에 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달래며 재를 뿌렸다는 곳을 한 바퀴 돌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같았다는 것이다.
친구의 애달픈 사연을 듣다보니 발길은 어느새 풍천장어 집 앞에 와 있었다. 우리는 술에 취해 무슨 말을 했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해가 다 가고 그 이듬해 몇 번 만난 뒤 12월 중순경, 정성껏 그린 예쁜 연하엽서 한 장을 받았다. ‘즐거운 성탄과 새해엔 행운의 꿈이 이루어지길’ -(馬龍)- 미술에 솜씨가 있는 최 선생이 보낸 엽서였다.
그 엽서를 받은 지 삼사일쯤 되었을까? ‘최마룡 위급, 급래’라는 한 장의 급전이 날아들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허겁지겁 눈보라를 헤집고 초저녁에 도착해 보니 학교운동장엔 장작불이 타 오르고 불빛아래 몇 몇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어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위급한 게 아니라 사망한 것이다.
전날 밤 숙직을 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숙직실에서 좀 쉬겠다고 했는데, 너무 오래 소식이 없어 찾아가보니 가쁜 숨을 고르지 못하고 헐떡이기에 급히 병원으로 옮기는 중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송 중 가족과 나에게 소식을 알리고 죽으면 화장하여 선운사에 뿌려 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음을……,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둔 최 선생은 고향을 거쳐 화장을 하고 지목한 곳에 뿌려질 때까지 내가 지켜봐 주었다. 그곳이 바로 여기 선운사 꽃무릇(彼岸花) 밭이다. 선운산가(禪雲山歌)의 ‘망부의 넋이 동백꽃이 되었나? (백제가요)’ 지장보살님의 가피력이 함께하는 지장 성지엔 ‘불공 온 처녀를 짝사랑한 동자스님이 상사병으로 승천하여 묻힌 자리에 피었다’는 전설의 꽃무릇을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읊었다.
‘잎들이 자진한 자리/ 꽃대 하나 선홍빛 족두리 화관/ 잎 향한 애잔한 너의 연모/ 끝내 애절한 소망으로 남는 구나’
꽃무릇은 수선화과로 여름엔 자취도 없던 초록빛 꽃대가 쑥 자라나 붉은 꽃을 피운다 하여 상사화, 석산 또는 피안화(彼岸花)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자기도취나 과욕과 자기애에 빠져 인생을 송두리째 포기하거나 망치는 일에 비유하여 꽃무릇의 꽃말은 많은 교훈을 남기기도 한다. 객관화된 자신의 참모습을 냉철하게 보고 자기 모순에 빠지는 일이나, 서둘러 자포자기하는 사례가 없도록 해야 할 것 같다. 백안(白顔)의 소녀와 다정다감했던 최 선생의 애절한 사랑이 나를 슬프게 한다. 이곳 선운사에 오면 나는 꽃무릇처럼 애닲게 살다가 이승을 떠난 친구의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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