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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행촌' 에세이모음
작성자 이기택
작성일 2009-04-25 (토) 04:05
ㆍ추천: 0  ㆍ조회: 2851      
고향산책
고향산책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기텍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초, 나는 오랜만에 고향산책길에 나섰다. 열여섯 나이에 고향을 등진 채고 학교에 다녔고, 직장 따라 외지만 떠돌다가 이제 황혼의 나이가 되어 한가로이 산책길에 나서니, 참으로 만감(萬感)이 서리고,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해마다 명절과 시향 때를 비롯하여 대소가의 애경사 때면 고향을 찾지만 그때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고향산책 한 번 못하고 바삐 살아왔는지 모른다.

오전 9시 정읍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 고향은 물 맑고 산 좋은 정읍 땅이다. 남쪽에  내장산과 칠보산(七寶山)이 동서로 누워있고, 서쪽에는 두승산(斗升山)이 우뚝 서서 사방의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름진 고장이다. 7대조께서 옛 고부 땅에 정착하신 이래 뿌리를 내려 살아온 우리 집안 조상전래의 고장이다.

오늘의 정읍은 백제 때는 정촌군(井村郡)이였고, 신라 경덕왕 때는 태산군(太山郡)에 속한 정읍현이었으며, 고려 때는 고부군(古阜郡)에 속했는데, 정읍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조 때에는 현감을 두었다가 고종 32년(1896년)에 정읍군이란 행정구역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버스가 도심을 벗어나 용머리고개를 넘어서자, 잊고 있던 옛날의 추억들이 실타래 풀리듯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나 고향에 갈 때는  이 용머리고개에서 차를 탔던 학생시절의 기억에 젖어 있었는데, 버스는 잘 포장된 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이 시외버스는 항상 옛 1번 도로로 달려 원평과 태인을 거쳐서 정읍으로 간다. 그래서 나는 고향에 갈 때는 언제나 이 버스를 애용한다. 옛 국도 1번 도로에 대한 애착 탓인지도 모른다.
버스는 어느덧 쇠튼재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데 옛날 그 쇠튼재가 아니었다. 새로 내는 산업도로가 터널을 뚫어 휘황찬란한 전등 속의 터널을 삽시간에 지나쳐 버린다. 이를 두고 금석지감이라 하는 것이리라. 그 옛날 목탄차가 오르다 못 오르면 온 승객이 내려, 밀어야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버스는 한달음에 태인 정류소에 이르고 잠시 정차 했다.

내 고향 이웃 읍면인 태인은 전통문화의 고장으로 칠보면의 유적지와 더불어 이름난 곳이다. 일찌기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통일신라 말 이곳(태산)의 태수로 부임, 유교주의적 덕치를 통해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유학 발전의 기초 또한 이곳에서 다졌다. 칠보면의 무성서원(사적166호)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위패와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에 유교문화의 씨를 뿌려,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유교 즉 성리학이 국가통치이념으로 꽃피울 수 있게 한 인물이다. 이런 탓에 칠보면은 유교문화의 텃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성종 대에 정극인이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태인으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동진강 시냇가에 앉아, 봄날의 경치를 관상하면서 노래한 상춘곡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모태로서 잘 알려져 있다. 태인에는 호남제일정이란 현판으로 유명한 피향정(보물 제289호)이  있고, 세종 3년(1421년)에 건립된 태인향교가 있다. 태인향교는 타 지역 향교에 비해 부각되는 이유인 만하루가 세워졌는데, 이 만하루는 영조대왕의 생모인 최숙빈의 탄생지가 이곳이기에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버스는 보물 제289호인 피향정을 스쳐 지나간다. 피향정은 최치원 선생이 이곳 태수로 있을 때  풍월을 읊었던 곳이다.

달리는 버스는 막상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에 발자국이 서려있고, 그 발자국 마다 아직도 체취가 남아있을 듯한 노른자위 고향땅인 정읍시 북면을 지나친다. 진짜 천천히 자세하게 바라보고 싶은 고장인데도 말이다.

여름이면 물장구를 치며 멱을 감던 추억이 서린 저수지! 1960년대 말 운암도수로가 설치되면서 농경지로 변한 저수지 자리 그리고 바로 그 옆의 농공단지와 옮겨 신축한 북면 면사무소며 지서 건물들을 스쳐 지나간다.

이 농공단지 자리는 본래 넓은 야지여서 6.25이후 군에서 제2훈련소부지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그 뒤 향토사단부지로 선정된 바 있었으나, 풍기문란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곳인데 1970년초 농공단지가 들어섰다. 농공단지보다는 군 시설이 들어섰다면, 훨씬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때늦은 주민들의 후회는 어쩌면 인간만사 새웅지마란 말을 생각하게 한다.

 정읍시외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천변의 흐드러지게 핀 그 찬란한 벚꽃을 관상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내장산 벚꽃 길까지 갈 것도 없었다. 새순이 움트는 봄, 여름의 신록, 가을의 화려한 단풍,  겨을의 설경 등 찬란한 내장산의 아름다움은 사계절 언제나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가 되었다. 점심은 먹어야 하는데, 혼자인 것이 아쉬웠다. 애당초 나만의 한가로운 산책길이기를 원하였기에 동반자를 꺼려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천천히 마루고개를 향해 걸었다. 마루고개는 그 유명한 정읍사의 망부석을 떠올리게 하는 고개마루다. 남편의 무사귀가를 비는 아내의 간절한 여심을 기리기 위해 망부상이 정주시 내장산 기슭 월령봉 잔디밭(1986,12,건립)과 정주시 내장 저수지 아래 호수공원(1984,6,건립) 두 군데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의 ‘망부석 재현(정읍) 북 십리'라 하였으니 이 마루고개가 망부석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루고개는 오르기 힘든 가파른 고개였었다. 그러나 절토(切土)하여 고개가 낮추어져 쉽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옛날 우리 고향사람들은 정읍 장날이면 걸어서 다녔는데, 이 고개 넘기를 힘들어 했었다. 그래 이 고개마루 주막집에서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장에 갔었다. 그 옛날 주막집은 간 곳이 없지만, 식당도 있고 조그마한 수퍼도 있었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 식사와 더불어  유명한 그 정읍 약주 한 잔을 마셨다. 컬컬한 참에 어찌 그 유명한 정읍약주를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읍 약주는 맛이 좋고, 독특하여 일제시대부터 그 전통을 이어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첫째는 정읍이 문자 그대로 샘골(井州) 이기 때문에 이디를 파도 청강수(淸江水)이며, 물맛 또한 일픔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기후가 술을 빚기 알맞게 형성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주 한 잔을 마시니 얼큰하였지만, 경쾌한 마음으로 북면 보림리(寶林里) 행 시내버스를 탔다. 보림리는 칠보산(七寶山) 바로 밑에 자리한 마을이다. 산골이어서 옛날에는 찻길이 없어 버스가 다닐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작로도 나고, 정기버스가 다닌다. 마을 가까이에는 초등학교 시절의 단골 소풍목적지이던 보림사가 있다. 그때에는 어찌 그리도 멀었는지 모른다.

 보림사에는 설화 같은 실화가 지금도 이 고장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일제시대 오랫동안 면장을 지낸 이보(李寶)라는 분은 그 모친께서 이 절에서 치성을 드려 만월의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아 보(寶)라 이름하였다. 그리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가 죽고, 번창했던 집안이 6.25를 지나면서 집안이 망했다. 그래서 만월의 태몽으로 영화가 오래가지 못했다느 설화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보림리에서 젊은 손님 세 사람을 실은 버스는 복흥리에 이르렀다. 복흥리도 산골마을이다. 밭이 많고 논이 귀한 곳이다. 이곳은 4.19혁명 후 민주당 정권시절, 첫 민선도지사를 지낸 김상술 선생의 태생지이다. 선생은 우리 고장의 몇 안 되는 성공한 유명인 중 한 분이지만, 내가 존경함은 그분이 고구마박사라는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선생은 산골 가난한 농부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일찍이 그는 식량난의 해소를 위해 고구마재배법을 연구하여, 한마지기(200평) 밭에서 40가마의 고구마를 수확하도록 하여, 그의 집안은 물론 지역사회에도 순회강연을 하며 식량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고구마박사로 이름난 분이였다. 우리 고장이 고구마 명산지로 유명하였던 것은 선생의 공로다. 그 당시 논 한 마지기에서 상답이라고 해도 쌀 3섬의 수확인데, 고구마 40가마는 쌀 4섬 값이었으니 밭에서 논보다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한 것이다.

북면 소재지에서 내린 나는 모교 초등학교를 찾았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1970년대 초 친구들과 같이 우연히 돌아봤던 일이 있었으니 30여 년 만인 듯싶다. 학생들이 많이 줄었다는 모교의 운동장에는 휴일이라서인지 뛰노는 아이 하나 없이 조용하고 쓸쓸하였다. 우리 6형제가 이 학교를 다녔고, 운동회 때면 남들이 부러워했던 형제였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 홍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는 응원가가 들리는 듯한 그 모교운동장을 뒤로 하고, 나는 총총히 걸어 나왔다.
                        (2009.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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