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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정원정
ㆍ작성일	2010-03-07 (일)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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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은 노을이 되어
지난날은 노을이 되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정원정

눈송이가 하염없이 소복소복 쌓이는 이슥한 밤이었다. 역사 안 대합실에는 추위에 움츠러든 몇 사람이 온기를 찾아 톱밥난롯가에 모여 있었다. 막차를 기다리는 그들 중 쿨럭이는 기침소리는 오래 앓은 감기 탓이리라. 몇은 졸고 더러는 손바닥을 톱밥난로 불빛에 적시고 있었다. 찬 유리창에는 희미한 전구 불빛과 난로의 불빛이 어른거려 눈이 시리게 꽃무리가 그려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 하나 환한 얼굴은 없다. 몇 날 며칠 동안 땟국 한 번 씻지 않은 것 같은 얼굴에, 입은 옷은 언제 빨았는지 기억에 없어 보인다. 실밥이 군데군데 뜯겨진 허름한 옷일지라도 그해 겨울엔 두텁기만 하면 되었다.

누군가는 고향으로부터 비보를 듣고 귀향하는 걸까. 수심 깊은 얼굴이다. 되는 일 없이 몹쓸 기억만 가슴에 담고 있는 얼굴도 있다. 모처럼 얻은 일터인 공사판에 내일 맞추어 가야하니 늦은 밤, 막차를 기다리는 걸까. 모두들 담배 연기 가득한 대합실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누구는 그나마 동이 난 열차표는 구할 수가 없었다. 자정 넘어 당도한 열차는 단풍잎 같은 예쁜 차창을 달고 있었다. 몇 사람만 겨우 태운 채 열차는 눈 내리는 철로 를 미끄러지듯 흘러가 버렸다. 남은 몇 사람은 열차가 지나간 텅 빈 자리를 횅댕그렁한 눈으로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람처럼 애꿎은 담배를 다시 피워 물었다. 어슴새벽 열차를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밤하늘에서는 여전히 송이 눈이 내리고 싸륵싸륵 쌓인 설원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 순간 지난 한 시절의 그리움이 밀려왔다면 또 얼마나 가슴이 멜까.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읽고 내 나름으로 상상해 본 것이다. 8 ‧ 15 광복 뒤 혼란스럽던 시기와 한국전쟁 뒤 무질서했던 시절, 어느 소읍의 간이역 같은 대합실을 그려 보았다. 내가 객지를 오가며 때론 밤으로, 새벽으로 열차를 기다리며 보았던 여부없는 정경이기도 하다. 그 시절 남루한 옷차림은 보기에도 익숙했다. 난리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일지언정 살기는 팍팍했다. 너도 나도 후출하기만 했다. 삶터를 잃어버린 유랑객 같은 허기진 나날이었다. 곽재구의 시 구절처럼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딴 세상을 살아온 듯, 어리어리한 꿈결 속을 지나온 것 같다.

그때로부터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그 옛날 누추한 역사도 반듯하게 새로 지어졌고 대합실에는 구걸하던 노숙자들도 없으며 깨끗하게 정돈 되어 있다. 열차표를 못 구해 발을 동동거릴 일도 없다. 그날 서울행 열차를 놓치면 대학 개강 일을 못 맞춰 마지못해 좀 열없이 역장실로 찾아가 사정하는 일도, 역장의 따뜻한 배려로 승차하게 된 일도 없다.

언젠가는 대전에서 경부선 열차를 탔다. 당시의 전시연합대학인 모교를 찾아 가는 길이었다. 낡은 기차는 가다가다 쉬니 부산행은 멀기만 했다. 무슨 사고였을까. 어느 경상도 낯선 간이역에 내려졌다. 동기생과 나는 난감했다. 마침 지나는 군용차에서 얼굴이 새까만 흑인 군인이 올라 타라했다. 그가 우리 몸에 손이라도 댈까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다른 칸에 타고 있던 한국 장교가 괜찮으니 올라 타라했다. 흑인 군인은 아가씨 둘이 탔으니 좋아서 싱글 벙글하며 먹을 것을 내 놓기도 하고 저희들 고국의 가족사진을 보여 주며 자랑하는 것이었다. 영어를 못하는 우리는 그네들과 손짓 발짓과 눈치와 글씨로 통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심 겁이 났다. 밖이 어둑발이 지고 저녁이 되자 그들이 왈칵 달려들 것만 같아 그들의 검은 피부가 더욱 무섭게만 보였다. 부산을 얼마 남겨 놓고 초량역에서 기어이 내리고 말았다. 밤에 내린 초량역은 생소했고 고생하며 가까스로 부산까지 갔다.

어려운 세월을 통과하면서 겪은 추억들이 자못 쓸쓸하게 가슴을 적실 때가 있다. 마치 펄펄 눈 내리는 들녘의 외딴 집 불빛처럼 먼 옛날 그 시절이 번번이 그립게 어릿거린다. 하찮은 일인데도 지난날의 추억은 노을이 되어 사실보다 더 곱게 채색이 되나보다. 해질녘에 산 밑 풀숲 냄새가 스치듯, 한 번씩 아가의 배냇냄새가 풍기듯 그 순간들의 환영이 애잔히 코끝을 시리게 한다.

(2010.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