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효순
ㆍ작성일	2020-04-22 (수) 06:39
ㆍ홈페이지	http://crane43.kll.co.kr

ㆍ추천: 0 ㆍ조회: 420

사람꽃
사람 꽃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김효순

오늘은 우리나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하는 날, 임시공휴일이다. 사전 투표를 마친 우리 가족은 간단하게 점심 식사 준비를 해서 소풍 길에 나섰다. 작은딸이 근무하는 운암에 있는 조그만 교육기관의 운동장이 목적지였다. 구불구불한 옥정호반 십여 리 길은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세 살짜리 손녀가 ‘하얀 꽃이가 이쁘다. 팝콘 꽃이네~’ 라며 탄성을 지른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호숫가라서인지 바람이 제법 성가시게 불었다. 바람 길을 피해 볕이 잘 드는 곳에 짐을 부리고 간이 텐트를 펼쳤다.
두어 번 텐트 속을 들랑날랑하던 손주 녀석들 손에 거품이 뿜어져 나오는 물총이 쥐어졌다. 아직 새싹이 돋지 않은 잔디운동장에는 자수를 놓은 듯 드문드문 노란 민들레꽃들이 피어있었다. 나는 이 총잡이 녀석들을 이끌고서 마른 잔디 운동장으로 진격했다.
항상 아기로만 보였는데, 올해 네 살이 된 맏손자가 달리는 모습을 보니 다리에 제법 힘이 붙었다. 타고난 운동 신경이 좀 발달해 보이던 세 살짜리 손녀는 제 오빠보다 몸이 더 날랬다. 두 살배기 손자도 제 형과 누나 뒤를 뒤뚱거리며 따라 다닌다.
이 녀석들이 달려와 비눗방울 권총으로 겨냥하는 과녁은 회갑을 훌쩍 넘긴 이 할머니다. 나는 ‘살려 주세요’라고 애원을 하면서 붙잡혀 주기도 하고 이리저리 피해 달아나 주기도 해야 한다. 아주 절박한 소리를 낼수록 녀석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에는 윤기가 입혀진다. 방울방울 끝없이 뿜어질 것만 같던 비누 거품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녀석들은 물총을 팽개치고는 이제 철봉 아래에 있는 미끄럼틀로 달려갔다. 나지막한 층계 위에 있는 철봉을 건너가면 미끄럼틀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맏이는 겁이 난다며 그 층계를 못 올라간다. 둘째는 두어 번 ‘함미! 도와 줘’를 외치더니 나중에는 혼자서 올라가서 철봉대에 매달리기도 했다. 막내는 아예 제 형을 따라서 미끄럼틀 아래로 들어간다. 그 아래로 들어가다가 이마를 부딪쳤는데 울지도 않는다. 손자 녀석 둘이는 금세 개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놀던 막내가 미끄럼틀 밑에서 빠져 나올 때는 머리를 낮추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온다. 다른 중생들도 이런 지혜를 지니고 태어날까?
수선화가 한들거리는 울타리 너머, 언제부터였는지 창문이 열린 경찰 자동차 한 대가 벚꽃그늘 아래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야~ 경찰차다’ 환호성을 지르며 쫒아온 녀석들이 경찰차를 향해 일제히 배꼽인사를 했다. 그러자 경찰아저씨도 크게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설핏 해가 기울어가자 봄바람이 일어났다. 어디서 그 바람을 타고 왔는지 하늘 위에 커다란 솔개 하나가 나타났다. 페러글라이더였다. 그 물체는 한참 동안을 뱅글뱅글 맴돌더니 운동장에 내려와 앉았다. 놀란 토끼가 되어 그 광경을 바라보던 녀석들은 그 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자 고사리 손으로 박수를 쳤다.
긴 봄날이 저물어 가면서 바람의 심술이 점점 심해졌다. 제 아빠 따라 몇 차례 캠핑을 다녀본 큰 녀석이 이제는 텐트에 들어가서 좀 쉬자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돌아와 보니 텐트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날아갔다는 제 아빠의 설명에 낙담한 녀석은 여기저기 둘러보지만, 이미 자동차 트렁크 안으로 들어간 텐트가 녀석의 조그만 눈에 띌 리 없지.
나는 섭섭해 하는 녀석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그 작고 보드라운 손을 쥐고서 삼층 건물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높고 긴 벽을 가득 채운 여러 사진들을 보면서 녀석은 ‘저게 뭐야?’를 되뇌었고. 나는 에펠탑과 뉴욕과 런던 브릿지와 캐나다 등을 되풀이해서 읊어주었다.
올 봄, 고약한 ‘코로나19’는 꽃샘추위마저 주눅 들게 만들었을까? 그럭저럭 심하게 까탈을 부리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에 꽃들만이 유난히 환한 봄날을 누리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은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데, 오늘 나는 염치도 없이 상큼한 봄날을 누렸다. 이 꽃 저 꽃, 봄꽃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어찌 나의 여린 사람 꽃들 -손주들 – 보다 더 고울 수 있겠는가! (202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