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내 나이가 고희(古稀)에 접어들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내 나이가 칠순이라니 놀랍다. 내가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단 말인가? 나는 회갑잔치와 고희잔치를 열 수 없었다. 세상의 풍속이 그렇게 변해버린 까닭이다.
자녀들의 뜻에 따라 우리 부부는 지난 6월 고희기념으로 캐나다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래도 무언가 허전하여 지난 가을에 고희기념으로 열두 권 째 수필집《나는 행복합니다》를 출간했다. 그 책을 가까운 문우들이나 지인들에게 한 권씩 나누어 드리고 나니 다소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는 고모와 이모가 각각 세 분, 외숙 두 분, 당숙 두 분이 계셨다. 아버지가 외아들이시니 사촌은 없다. 그런데 고모와 이모, 외숙, 당숙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들이 낳은 자녀들이 많다. 그들은 나와 가까운 피붙이요, 형제들이다. 그들에게도 고희기념 수필집을 한 권씩 보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종사촌과 내종사촌, 외종사촌 그리고 재종형제들의 주소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집안마다 맏아들에게 자기 동생들의 집주소를 알려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한 주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는가 싶어서 다시 카카오톡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도 대부분이 주소를 보내주지 않았다. 저마다 바빠서 그러는 줄 알았다. 어떤 맏이는 동생들의 주소를 모른다면서 덜렁 자기 주소만 보내주었고, 또 어떤 맏이는 동생들의 전화번호만 보내주기도 했다. 할 수 없어서 맏이들이 알려준 전화번호로 일일이 전화를 걸어 주소를 알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고희기념 수필집을 발송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맏아들마다 자기 동생들의 전화번호는 알지만 주소를 아는 이들은 드물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현대인들은 유목민처럼 자주 이사를 다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제남매 간에도 비상연락망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구나 싶어 아쉬웠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탓으로 형제자매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런 현상이 내 주변의 문제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도 맏아들 집에 모이지 않고 저마다 자기 집에서 핵가족끼리 즐긴다는 이야기가 헛소리는 아닌 성싶었다. 그 명절연휴 때 가족끼리 관광지를 찾거나 해외나들이를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형제자매들 간에도 겨우 비상연락용 전화번호만 파악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전화번호가 바뀌게 되면 현대판 이산가족이 될 게 아닌가? 형제자매 간의 거리가 부모 생존여부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희기념수필집을 출간하고 발견한 새로운 세상 풍속도였다.
어느 날, 감 한 박스가 배달되었다. 발신자의 이름은 없고 전화번호만 기록되어 있었다. 낯익은 전화번호라며 아내가 전화를 하니 막내외숙모의 목소리였다고 한다. 고희기념 수필집을 받고 나의 고희를 축하하려고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하시더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또 어릴 때 나한테 세배를 다녔는데 오빠가 벌써 고희를 맞았느냐고 문자메시지를 보내 준 이종사촌 여동생 숙의, 다음 주 시간이 날 때 연락해 달라고 메일을 보내 준 이종동생 병의, 수필집 잘 받았다며 전화를 해 준 이종동생 해용이, 중동 시리아에서 일을 하면서 축하메일을 보내준 내종동생 익호, 수필집을 잘 받았다며 고희를 축하해 준 내종동생 금숙이가 그래도 즉각 반응을 보내 준 가까운 동생들이다.
지금은 경로효친사상(敬老孝親思想)이 사라진 시대다. 노인들도 대접받으려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그런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회갑잔치는 손자손녀들의 백일잔치에, 고희잔치는 손자손녀들의 돌잔치에 물려준 게 요즘의 새로운 가정 풍속도가 되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上愛無 下愛有, 즉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은 있다는 말의 참뜻을 실감할 수 있다. 요즘 어디 가서 회갑잔치니 고희잔치니 하는 이야기를 들먹거렸다가는 어른 대접을 받기 어려운 세상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냥 홀로 가슴속에 깊이깊이 묻어둘 일이려니 싶다.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 수필 등단/ 《나는 행복합니다》등 수필집 12권,《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등 수필평론집 2권/ 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전주시예술상, 전라북도문화상, 목정문화상 등 다수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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