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己亥年)은 60년 만에 찾아온 ‘황금돼지 해’라고 한다. ‘60년’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참으로 긴 세월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희소식이라도 전해 주려는 듯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황금돼지 해’의 아침 햇살을 보는 순간, 60년이란 세월은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리석게 하나부터 예순까지 세어보았으나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가족끼리 명소(名所)인 일출봉을 찾아 해돋이를 보며 한 해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소망을 기원한다. 나는 내 작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지난 삶을 회상하면서 모악산 정상을 바라보며 작은 소망을 빌곤했다.
돼지는 1년에 두 번 정도 새끼를 낳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돼지 한·두 마리를 키워 목돈을 만들어 살림에 보탬이 된다. 집이나 큰 건물을 지을 때는 돼지머리 입에 지폐를 넣어 안녕과 발전을 기원했다. 돼지꿈을 꾸게 되면 길몽(吉夢)이라 여겼고,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와 같이 돼지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神)에게 뭔가를 갈구할 때 바치는 제물이 되었고, 전통적으로 복(福)과 부(富)를 상징할 만큼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친근감을 준다.
나는 1960년쯤 ‘저금통’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 때까지는 ‘돼지저금통’을 보지도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10㎤정도 크기의 빈 성냥 통을 종이로 붙여서 만든 ‘저금통’이었다. 친척할아버지께서 서당 훈장을 하셨지만 집안형편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서당에 나를 보내지 않으시고 시장에서 천자문(千字文) 책 한 권을 사오셨다. 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는 윗목에서 가마니를 짜고, 나는 아랫목에서 '하늘 천, 땅 지…'라고 입으로만 외웠을 뿐, 한자를 쓰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불과했다. 책을 덮어놓고 외우면 아버지로부터 동전을 받아서 ‘성냥 통 저금통’에 넣는 재미였다. 잔돈이 가득찼을 무렵 아버지는 해리시장에서 그림이 그려져 있고, 반들반들하게 생긴 도자기 같은 ‘요강단지’를 사오셨다. 고등학교 때 2,000자 한자책을 사서 스스로 익힌 결과 대학 교수님의 강의시간에 어떤 한자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성냥통 저금통’이 나에게 준 소박한 첫 선물이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77년 어느 날, 사무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문방구가게 입구에 들어섰을 때 상상하지 못했던 ‘돼지저금통’이 제일 먼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처음으로 보는 ‘돼지저금통’이라 신기했다. 바라보는 순간 어릴 때 ‘성냥갑저금통’이 떠올랐다. 사려고 했던 것은 뒤로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든 빨간색 ‘돼지저금통’을 먼저 앞에 놓고 계산을 했다. 집으로 오는 길은 어린애들처럼 기대감과 즐거움이 어우러졌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아내와 부지런히 키웠다. 정성들여 키운 ‘돼지저금통’는 제법 살이 찌고 여러 마리의 새끼를 밴듯 무거웠다. 들어보고, 만져보고, 쓰다듬으며 재미있어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자 아내는 '돼지저금통이 없어졌다.'며 목멘 소리를 했다. 그 이후 돼지는 젖먹이 큰애와 같이 잠자기도 불편한 단칸방 생활이 불편했던지 말없이 행방불명되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뒤 냄새를 잘 맡는 ‘좀도둑’이 그것도 초등학생이 집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훔쳐간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내와 나는 허탈함을 달래야만 했다. ‘돼지저금통’과 첫 만남이었는데 오래가지 못한 인연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
선·후배들이 손자와 손녀 이야기를 하면 부러워했던 나에게도 2015년 3월 8일 아기천사 ‘첫 손녀’를 보게 되었다.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후배에게 자랑할 겸 전화를 걸었다.
“어이, 며느리가 출산하면 어떻게 해야 된당가?”
“형님, 할아버지 선배로서 말할 것 같으면 저는 이렇게 했어요.”
“그렁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형편에 따라 다르지요.”
“응, 알았어, 고마워.”
후배는 손녀의 돌, 생일, 용돈 등으로 한동안 수다를 떨었다. 손녀의 돌을 기다리며 ‘돼지저금통’을 준비했다. 아들에게 못해준 것, 그 이상으로 해 주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조그만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을 때마다 귀한 손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 주기를 기도했다. 손녀의 돌이 될 무렵 제법 토실토실하게 된 ‘돼지저금통’을 며느리에게 애기 이름으로 통장을 만라고 주었다. 작지만 나에게는 행복이요 큰 보람이었다.
천지(天地)의 기(氣)를 모두 품은 듯한 모악산 정상을 향해 금년에도 “가정의 평화와 건강, 두 아들의 순탄한 삶”이 나의 작은 소망임을 알렸다. 해가 질 무렵 동전을 모으는 락(樂)을 되찾고자 돼지저금통을 사러 상점에 간 것으로 새해 첫날 나들이를 했다.
공지사항
문화 류씨 이야기
운조루 11대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