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사래를 치면서 천천히, 천천히를 연호하는 사람들 속에 내가 있다. 조울증이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떠올리는 말이 있다.
“인디언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잠시 쉬면서 자신이 온 길을 되돌아본대. 이유는 그들의 걸음이 너무 빨라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보아서지.”
언제부터인가 빨리빨리의 노예가 되어 버려 주변과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마저도 망각하고 사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사나워지곤 한다.
내가 ‘슬로우 시티(slow city)’를 처음 안 것은 단골 관광회사를 통해서였다. 사장님이 리플릿 한 장을 내밀면서 2008년 여름휴가지로 ‘증도’를 추천해 주었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무엇이 좋은데요?”
나의 질문에 사장님이 열거하는 좋은 것이란 ‘천일염’, ‘짱뚱어 다리’, ‘낙조’, ‘노을’ 등이었다. 소금이 천천히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해질녘과는 어떤 관계이고? 궁금증이 증폭되자 순식간에 ‘엘도라도’라고 하는 시설이 좋다는 리조트까지도 흥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슬로우 시티’라는 세계를 알게 되었으니 뭣도 모르고 증도를 방문한 것보다는 소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슬로우 시티(slow city)!’
‘패스트 시티(fast city)’에 대항하는 느리게 살기 운동. 여기서 city의 개념은 농·어촌에 대비되는 도시의 의미가 아니고 마을 또는 지역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그레베’가 효시다. 피렌체에서 약 1시간쯤 떨어진 인구 1만4천여 명의 소도시. 파울로 사투르니니란 시장이 2000년부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시작한 운동이다.
2007년 12월 1일자로 국제연맹인 citta slow에 전남 신안군 ‘증도’, 장흥군 ‘우산슬로월드지구’, 완도군 ‘청산도’, 담양군 ‘창평면’ 등 우리나라의 4개소가 가입 되었고, 2009년도에 경남 하동군 ‘억양면’이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단계다.
이런 가운데 정말 한국다운 느림의 컨셉을 어떻게 찾을까 하는 논의가 뜨겁다. 이미순, 양위주의 ‘슬로우 운동을 통한 지역관광 활성화방안’이란 논문의 제언이 내 구미에 맞는 것은 진솔한 느낌과 편안한 어감 때문이다. 한가롭게 거닐기, 듣기, 권태롭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찾기 등, ‘증도’ 해설사란 분은 굼벵이라는 심벌과 전등 없는 집〔dark house〕체험을 힘주어 자랑하기도 하는데, 언제나 이런 슬로건들이 ‘슬로우 시티’를 자처하는 여러 지역에 조화롭게 안착될지 성급한 마음이 앞선다.
내가 ‘슬로우’에 관심을 갖은 것은 건강 때문이다. 나는 5년 전에 위암과 맞서게 되었다. 절망 속에 피신한 곳이 여수에 있는 요양병원이었는데 그곳에서 3주일간 가료하면서 뜻밖의 처방을 받았다. ‘조급증’을 버리고 ‘에덴’을 지향하라(BACK TO EDEN)는 것이었다.
“조급증이란다. 조급증!”
가슴에, 내장에 덩어리를 만드는 원인이 조급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래, 천천히 가자.’ 속도조절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주문을 외웠는지 모른다. 최면요법처럼 나만의 독백구절을 만들어 되뇌기도 했다.
“넌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 거니,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나 있냐?”
사치였던가. 퇴원한 뒤 일에 복귀하면서 나는 순식간에 시스템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기름집 가마솥에 든 깨알처럼 까맣게 볶여지고 있었으니 그런 나에게 있어 에덴은 예배당의 종처럼 시간이 되면 울리는 감각 속의 이상향이 되었고, 가속 페달을 밟는 생활은 전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돼. 넌 환자야!”
자신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과 채근을 했지만 그 말들은 항상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 타성으로 굳어져 몸 안에 벽을 만들고 있었다. 사람이 환경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2009년 여름, 태풍이 일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뉴스를 접하던 날, 나는 기어코 가마솥에서 튀어 나오고야 말았다. 내 고향이자 마음의 ‘슬로우 시티’인 ‘진안고원’으로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한 것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밝힌 변은 간단했다. ‘사는 방법을 좀 바꿔보고 싶어서’라고. 두 달이 지나면서 코멘트가 바뀌었다.
“이제 서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허! 허! 허! 패스트(fast)의 오랜 속박에서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정말 그렇다. 뭣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던지, 무엇이 그리 바빴던지 지난 몇 년을 생각하면 입안에 쓴 맛이 돈다. 성격 탓이었을까? 내가 그때 삼풍백화점에 있었다면 7초밖에 못 살았을 것이라는 여직원들의 이야기를 상기하니 섬뜩하기까지 했다. 청사 계단을 한 번에 두 개씩 오르던 일, 실기한 결재 서류를 검토하며 속 태우던 일, 뒤따라오는 차에게 추월당하지 않으려고 몸을 비틀던 일 등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쭈뼛거린다.
나의 슬로우 시티에서 아침을 맞으니 온몸이 상쾌하다. 일찍 일어나 조그만 암자로 산책을 다닌다. 예불에 여념이 없는 스님의 어깨너머로 머리를 디밀어 본다. 참견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관심 촉구용이다.
“언제나 스님과 마주해보나. 차 공양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발이 저려올 즈음이면 반가부좌를 풀고 일어난다. 대나무 대롱으로 흘러내리는 약수 한 잔을 받아 마시고 산을 내려온다.
근무가 끝나면 홍삼체험관에도 간다. 삼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얻기 위해서다. 어제는 홍삼분말을 얻어다 인절미에 뿌려서 먹었다. 깊은 향이 혀끝에 남아 있어 뿌듯했다. 지난 주말에는 ‘산골에 주막집 만들기’ 프로젝트팀과 합류해서 ‘신광재’에 갔다. 호남정맥 줄기를 좀 아는 내가 등산객 쉼터를 주막집 터로 짚어주니 지관 취급을 해주는 게 아닌가. 나중에 공술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군수영감님의 시간이 되는 날엔 몇 가지 아이디어도 낼 생각이다. 주제넘다 여길지 모를 일이지만, 처음엔 슬며시 귀농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물론 ‘슬로우 시티’에 관한 이야기로 가기 위해서다. 전라남도 쪽으로 다 몰렸다고 강조하면 열을 받을 게 뻔하다. 한반도에서 개마고원 말고 유일하게 고원이라 불리는 이곳 진안이야말로 진짜 ‘슬로우 시티’라고 목청을 높일 참이다.
진안의 물인들 천천히 흐르랴. 이곳이라고 사람들에게 뛰지 말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천천히’라는 행동양식이 생산성과 다른 방향이어서는 안 된다. 진안의 흐름에 그냥 나를 맡기리라 다짐한다. 조급증을 빨리 내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분주함을 야기하지 않아야 하겠다.
‘슬로우 시티!’ 어쩌면 이는 존재로서의 가치보다는 성숙된 행동들이 공공선으로 구현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초절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모여 더한 이상을 추구하는 곳, 그들의 움직임이 백합과도 같이 정갈하고 우보(牛步)와도 같은 느림의 미학에 천착한다면 또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곳에서 어쩌면 에덴으로 가는 길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도 해본다. 천천히……. 허물을 벗는 데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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