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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타임즈] 구례 운조루 고택 과 ‘코로나 위기’ 극복의 지혜
운조루. 운조루는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 금환락지로 불리는 명당에 세워졌다. 금환락지는 지리산의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는 뜻이다.
운조루. 운조루는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 금환락지로 불리는 명당에 세워졌다. 금환락지는 지리산의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는 뜻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세상이 달라졌다. 자연 세상사는 법도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주위사람들의 애경사에는 직접 찾아가 같이 시간을 보내며 위로와 덕담을 건네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잠깐 얼굴을 보고 돌아오는 것이 미덕이다. 악수도 생략된다. 주먹 쥔 손을 잠시 마주대하는 것이 의례적인 인사가 돼 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을 경계대상으로 삼아버린’ 코로나 시대의 표징이다. 코로나19 창궐이전의 세상에서는 직장, 혹은 모임에서 동료와 친구들은 스스럼(조심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이 없었다. 예전에는 친구들을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친구이든, 동료이든, 심지어 가족까지도 잠재적 코로나 19바이러스 보유자로 간주하고 멀리해야 한다.

코로나 세상은, 배려에 대한 개념도 바꾸고 있다. 마스크를 끼는 것은 본인의 건강을 지키는 것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다. 본인은 아무런 증상이 없을 지라도 다른 이들은 그렇게 여기질 않는다. 감염되더라도 며칠은 무증상인 경우가 많기에 마스크를 끼는 것은 꼭 지켜야할 에티켓이 됐다. 줄을 설 때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저만치 떨어져 서는 것이 예의다.

과거 못 먹고 못살았을 때는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돌보고 도와주는 것이 사회적 미덕이었다. 풍요로운 사회가 됐지만 절대적 빈곤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기부와 돌봄은 지금도 요구되는 선택적 미덕이다. 기부나 봉사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요구되는 절대적 가치는 아니다. 그렇지만 코로나 시대는 모두에게 보편적 호혜의 가치를 강요하고 있다.

운조루 ‘타인능해’ 쌀 뒤주.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운조루로 와서 뒤주의 쌀을 가져갔다. 유이주 가문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운조루 ‘타인능해’ 쌀 뒤주.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운조루로 와서 뒤주의 쌀을 가져갔다. 유이주 가문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코로나 시대는 선택사항이었던 최소한의 사회규범이나 에티켓을, 누구든 지켜야하고 실천해야 하는 강제적 건강수칙으로 ‘강요’하고 있다. 이 ‘강요’는 개인건강유지와 사회적 안정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기에 호혜적이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잘 지키는 사회규범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 위기가 시민의식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구와 서울 등 일부 종교시설과 광화문 집회와 같은 대규모집회에서 ‘코로나 19 n차 감염’이 폭발적으로 이뤄진 것은 이런 기본적인 사회적 규범이나 수칙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예배장소에서 신자들 간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마스크를 쓰고, 식사자리 등 소모임을 자제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일부 종교지도자들은 아집과 맹신에 사로잡혀 이런 기본수칙을 저버렸다.

이런 자기중심적 사고는 교인들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맞이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 나가지 않고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재택근무 일수를 늘리고 있다. 50인, 100인을 기준으로 모이는 사람도 제한하고 있다.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전남 구례의 고택 운조루(雲鳥樓)에 있던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뒤주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펼치는 지혜의 산물이었다. 타인능해는 ‘누구든 이 뒤주(쌀독)를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운조루의 주인들은 흉년이 들었을 때, 쌀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나 뒤주의 쌀을 가져가도록 했다. 측은지심의 배려일수도 있고, 크게는 공동체 정신의 발로일수도 있다.

타인능해 뒤주는 이웃이 평안해야, 나도 평안하고 마을도 평안하다는 공동체 삶의 상징이다. 코로나 세상은 내가 이웃을 잘 배려하고, 이웃 또한 또 다른 이웃을 잘 배려해야 잘살 수 있는 세상이다. 구례 운조루 ‘타인능해 뒤주’에서 우리는 앞이 캄캄한 세상을 헤쳐 갈 지혜를 찾을 수 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그 것이 ‘팬더믹 코로나 월드’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다.

 

운조루와 구례 오미리 마을

지리산은 남도의 영산(靈山)이다. 행정구역상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군, 경남 산청군·함양군·하동군 등 3도(道) 5군(郡)에 걸쳐 있다. 지리산의 남쪽은 구례군에 속한다. 지리산은 산이 깊고 자락이 넓게 펼쳐져 있어, 산이나 들에서 사는 이들에게 넉넉한 품을 제공하고 있다. 산세가 수려해 자연 명당(明堂)자리도 많다.

지리산자락이 남해바다를 향해 달려가다 멈춰선 곳이 구례 오미리다. 풍수지리상으로 오미리에는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구몰니(金龜沒泥), 오보교취(五寶交聚)로 불리는 명당 세 곳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금환락지는 ‘금가락지가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풍수가들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오미리 마을은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금구몰니는 ‘금 거북이가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터다. 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다섯 가지 보물이 쌓여 있는 모습의 지세(地勢)다.

운조루.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운조루는 명당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집이다. 품격 못지 않게 운조루가 품고 있는  정신은 배려와 상생이다.
운조루.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운조루는 명당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집이다. 품격 못지 않게 운조루가 품고 있는 정신은 배려와 상생이다.

오미리 3대 명당은 지리산 자락에서 구만리 들녘으로 이어지는 땅에 금구몰니, 금환락지, 오보교취 순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금환락지로 알려진 곳에는 오미동 유씨 집안 사랑채의 누정인 운조루(雲鳥樓)와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금구몰니와 오보교취 자리는 분명치 않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집 자리가 금구몰니와 오보교취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운조루가 포함된 고택(古宅)을 지은 이는 삼수공(三水公) 유이주(柳邇?)다. 유이주는 영조 때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낙안 군수 시절인 1773년, 낙안의 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다 침몰했다. 이 때문에 문책을 받아 함경도 삼수 땅으로 유배를 갔다. 유배에서 풀려 임금의 부름을 받자 운조루 짓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고 다시 관직에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가 1776년이다.

‘운조루’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왔다. 귀거래사는 ‘번잡스러운 관직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의 기쁜 마음’을 나타낸 시다. <귀거래사>에서 ‘운조’(雲鳥) 당호가 등장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시구의 첫 자를 합한 것이 운조루라는 당호가 됐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날다 지친 새들은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도연명은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귀거래사>를 통해 표현했고, 유이주는 이런 초연함을 본받기 위해 짓고 있는 누정의 당호를 ‘운조’라 했다. 그런데 막상 유이주는 기회가 주어지자 다시 출사(出師)를 했다. ‘운조루’의 주인인 유이주는 ‘운조’에 담긴 의미와 조금 다른 행보를 보였지만, 그게 흠이 될 수는 없다.

세곡선 침몰로 좌절돼 버린 ‘경세’(經世)의 포부를 다시 펼칠 기회가 왔을 때, 임금에게 충(忠)을 하고 나라에 성(誠)하는 것이 흠이 될 수는 없다. 어쩌면 예기치 않은 일로 낙안군수에서 물러난 뒤 구례 오미리 금환락지에 집을 짓는 것이 ‘발복’(發福)의 계기가 됐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명당(明堂)으로 알려진 ‘금환락지’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운조루 고택의 규모

오미동가도. 그림 아래쪽에는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다.
오미동가도. 그림 아래쪽에는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다.

한옥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상현씨는 운조루의 규모와 공간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운조루에 전해오는〈전라구례오미동가도>와 현재 이 집의 공간 구조를 살펴보자. 먼저 운조루는 대략 1,000평이나 되는 비교적 넓은 대지에, 방형에 가까운 돌담장을 이루고 있다. 남쪽에 연지를 두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대문 앞을 흐르는 시냇물로 일차적으로 외부 공간과의 구역을 정리한 뒤에 대문간과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중심부에는 안채를 두고, 남향의 건물군이 동서축으로 길게 배치된 장방형이다. 큰사랑은 서쪽 방향으로, 작은사랑은 남쪽 방향으로 중심채인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장독대가 있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각기 동서남북을 향하여 배치됨으로써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아래채와 중문 행랑채가 남향으로 길게 돌출되어 행랑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소실되었다. 행랑채는 바깥사랑마당과 안사랑마당을 가운데 두고 병렬로 마주 보면서 동서방향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운조루 안채. 안채의 건물들은 장독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운조루 안채. 안채의 건물들은 장독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운조루 사랑채. 큰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로 구성돼 있다.
운조루 사랑채. 큰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로 구성돼 있다.

또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전라구례오미동가도>는 1800년 전후의 운조루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원색으로 사랑마당 가득 그려 놓은 화초의 화려함 때문에 사랑마당에 통째로 정원을 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마당 없는 정원이 한옥에서는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사랑마당에 그린 화초는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인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누마루에 오르면 이 그림에 나타나는 정취를 직접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누마루에서는 마당에서 느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정서에 빠져들게 된다. 누마루라는 건축의 틀을 통해서 평범하게 지나온 주변 경치가 빼어난 경관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누마루는 높은 기단 덕분에 풍경을 들일 수 있고, 집에 들어서는 이는 넓은 기단 덕에 자칫 사랑채가 주는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다. 사랑채 건축에서 기단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 누마루의 난간에는 연꽃을 새겨 넣어 은유를 더했다. 송나라 주돈이(周敦?, 1017~1073)가 연꽃을 군자에 비유한 이후, 유학자에게 연꽃은 군자를 상징한다. 세한삼우(歲寒三友)인 소나무, 대나무, 매화를 주변에 가꾸어 그 의미가 누마루의 연꽃에서 하나 되게 하였다. 그는 이곳에 앉아 세한삼우를 바라보며 지조 굳은 군자의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누마루는 건축적으로 운조루 전체 건축의 중심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군자라는 완성체로 우주의 중심이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옥이 가지는 철학적인 확장성을 느껴 볼 수 있다. 사랑채 뒤쪽으로 두 칸의 건물이 이어져 있다. 하나는 글방이고 하나는 책을 보관하는 서고다. 이곳은 안채의 부엌과 바로 연결되어 생활의 동선 속에 완전히 흡수된다. 같은 사랑채 건물이지만, 사랑채의 앞쪽과 정서적으로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정원 꾸미기를 좋아한 성품은 이곳에도 이어져 꽃나무와 괴석으로 오밀조밀한 분위기를 연출해 작은 기쁨을 더해 준다. 담장을 대신하는 대나무 숲은 남도 특유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운조루가 품고 있는 배려와 상생의 정신

운조루에는 유씨 집안사람들의 ‘배려와 공생’을 느낄 수 있는 두 가지 유산(遺産)이 있다. 하나는 앞서 밝힌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진 뒤주(큰 쌀독)다. 유씨 집안사람들은 흉년이 들면 이 뒤주를 모든 사람들이 다 열수 있도록 했다. 식량이 떨어져 굶주린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와서 뒤주에 있는 쌀을 가져갔다.

운조루의 타인능해 뒤주. 쌀독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었다. 한 개의 구멍에 꽂혀있는 나무를 돌리면 다른 쪽의 구멍에서 쌀이 흘러 나왔다고 전한다.
운조루의 타인능해 뒤주. 쌀독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었다. 한 개의 구멍에 꽂혀있는 나무를 돌리면 다른 쪽의 구멍에서 쌀이 흘러 나왔다고 전한다.

다른 하나는 굴뚝이다. 운조루에는 지붕 쪽으로 올라가는 굴뚝이 없다. 굴뚝은 모두 마루 밑으로 나있다. 밥을 짓거나 음식을 만들 때 나오는 연기가 하늘로 퍼져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끼니를 잇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일이다. 운조루 주인장의 따뜻한 마음과 마을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굴뚝은 원래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 운조루를 지으면서 일부러 굴뚝을 낮게 만든 주인장의 마음이 곱다. 반상의 구분이 엄격했던 당시, 양반들은 아랫사람들의 처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운조루 사람들은 가난한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누구나 열수 있는 쌀독을 놓고, 밥 짓는 것조차 미안해했다.

마루 밑으로 난 굴뚝. 운조루에는 높은 굴뚝이 없다. 아궁이 연기가 마루 밑으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됐다.  밥 짓는 연기가 높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없는 자들의 마음을 배려한 유씨 가문 사람들의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다.
마루 밑으로 난 굴뚝. 운조루에는 높은 굴뚝이 없다. 아궁이 연기가 마루 밑으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됐다. 밥 짓는 연기가 높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없는 자들의 마음을 배려한 유씨 가문 사람들의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다.

코로나 공황(恐慌)시대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은 개인에게 엄격하면서도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이런 공생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걸려도 크게 아프지 않고 무증상으로 지나간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방종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활보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떼 지어 다니며 유흥가를 찾고 있다.

나 혼자만을 생각하기보다는 가족과 이웃의 안녕을 함께 염려하는 마음씀씀이가 요구된다. 희생이 우리 사회의 가장 소중한 가치 중의 하나인 것은 ‘내 것’을 이웃을 위해 내놓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 그리고 능력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기에 의미가 크다. 운조루에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배운다.

 

운조루의 구석구석

운조루 연못. 운조루 남쪽에는 연지가 있다.
운조루 연못. 운조루 남쪽에는 연지가 있다.
운조루 연못의 여름 풍경.
운조루 연못의 여름 풍경.

오미동 마을에 들어서면 연못과 긴 행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연못은 운조루 뒤쪽의 병풍산과 어우러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기능을 하고 있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은 도랑을 타고 흐르다 고택 앞 연지로 들어간다. 연지를 뒤로 하고 고택에 마주서면 솟을대문이 자리하고 있다.

운조루 앞 물길. 대문 앞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맑은 지리산 물이 흘러간다.
운조루 앞 물길. 대문 앞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맑은 지리산 물이 흘러간다.
운조루 대문. 뒷산인 병풍산과 어우러져 당당한 모습이다.
운조루 대문. 뒷산인 병풍산과 어우러져 당당한 모습이다.

대문에는 짐승 뼈가 걸려 있다. 당초는 유이주가 문경새재를 넘다 잡았다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유이주의 용맹함을 알리는 한편 잡귀나 병마와 같은 액(厄)일들이 집 안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벽사(?邪) 기능을 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호랑이 뼈를 가져가 버려 다른 짐승 뼈를 대신 걸어두었다고 한다.

운조루는 1천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 99칸(현재는 63칸)의 저택이다. 문중 문서에 따르면 한때는 883마지기(1마지기는 200여 평의 전답)의 농토가 있었다. 이 정도의 농사를 지으려면 소작인들 외에도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야 한다. 18칸이나 되는 긴 행랑채를 보면서 운조루 고택을 드나들던 수많은 농군들의 발걸음이 절로 떠올려진다.

운조루 연못 맞은 편에 길게 들어선 행랑채.
운조루 연못 맞은 편에 길게 들어선 행랑채.

운조루에는 세 개의 사랑채가 있었다. 큰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는 남아 있지만 안 사랑채는 소실됐다. 큰사랑채는 주인장이 머무르면서 손님을 맞거나 일을 보는 장소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별도의 책방도 있다. 책을 가까이하며 학문에 정진하고자하는 집주인의 면학의지를 볼 수 있다. 이 책방에서는 유씨 자손들이 과거공부를 했다.

아랫사랑채는 성장하고 있는 아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안사랑채는 주인내외가 나이가 들면 아들과 며느리에게 집안일의 주도권을 내준 뒤 손자들을 돌보며 말년을 보내는 곳이었다. 안채는 안주인이 거처하는 곳이면서 또한 집안의 대소사와 음식 만드는 일을 총괄하는 곳이다. 자녀들과 며느리들이 안주인과 함께 지내면서 성장하고, 집안일을 돌봤다.

운조루 툇마루. 고택의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운조루 툇마루. 고택의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안사랑채는 여인네들만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안사랑채는 운조루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드나드는 외부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부엌 주변에 머리 높이의 담장을 세웠다. 마당과 부엌 곁에 놓인 물확 역시 안주인 등 여인네들을 위한 것이다. 운조루에는 담장과 물 확처럼 여인네들을 위한 장치가 남아있다.

 

유이주 종가 9대 종부 이길순

2020년 지금, 운조루를 지키고 있는 이는 이길순 어르신(87세)이다. 전주 이씨 가문 출신인 이씨는 20살 때 유씨 집안으로 시집왔다. 부자 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정작 속사정은 그렇질 못했다. 구한말 까지만 하더라도 운조루 유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전답에 농사를 지을 때면 200여명이 넘는 일꾼들이 달라붙어야 했다고 전해진다.

유이주 종가 9대 맏며느리 이길순.
유이주 종가 9대 맏며느리 이길순.
운조루를 지키고 있는 이길순 맏며느리.
운조루를 지키고 있는 이길순 맏며느리.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무자비한 공출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유씨 가문 사람들은 산을 개방해 마을사람들이 나무를 해서 먹고 살도록 조치했다. 광복이 됐지만 어수선한 시국이었다. 유씨 가문 사람들 역시 궁핍해져 ‘타인능해 뒤주’는 사실상 제 구실을 못했다. 그렇지만 산에서 나는 것들을 나눠주고, 매우 곤란한 사람들에게는 붙여먹을 땅을 조금씩 떼 주었다.

6·25때 운조루 유씨 가문 살림규모가 확 줄어버렸다. 그렇지만 아랫사람들에게 후하고, 마을사람들에게 넉넉하게 했던 탓에 유씨 가문 사람들은 다치지 않았다. 다른 집들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집이 불에 타버리는 등 난리를 겪었지만 운조루와 운조루 사람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운조루 사람들이 쌓아온 덕이 운조루 사람들의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운조루 건물 마루 밑에 있는 수레바퀴.
운조루 건물 마루 밑에 있는 수레바퀴.
운조루 사랑채 툇마루. 구례군 문화관광 해설사 임세웅씨(우측)이 운조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운조루 사랑채 툇마루. 구례군 문화관광 해설사 임세웅씨(우측)이 운조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운조루는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체적으로 쇠락한 상태다.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등의 규모에 입이 벌어지지만, 이를 지켜내는 손길이 부족한 탓에 운조루에는 먼지만 쌓여있는 곳이 많다. 마루 밑에는 큰 농사를 지었을 때 사용됐을 법한 마차바퀴와 농기구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과거, 운조루에는 귀한 고서와 그림, 글씨 들이 많았다. 이길순 어르신은 3남2녀를 두었지만 모두 밖에 나가 살았다. 혼자서 30년 동안 운조루를 지켰다. 그래서 운조루를 제대로 건사할 수가 없었다. 도둑과 강도들이 많이 들었다. 어떤 이는 훔쳐가고, 어떤 이는 행패를 부리며 빼앗아갔다.

세월을 이겨내지 못해 운조루 건물들은 쇠락해 가고, 수백 마지기 농사는 어느 사이 온데 간 데 없어져 버렸지만 운조루 유씨 가문 사람들의 정신은 여전히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배려와 상생, 그리고 어려운 세월을 이겨내고 운조루를 지켜낸 종부(宗婦)의 의연함 등을 볼 수 있다. 운조루. 사람들이 함께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지혜가 담긴 곳이다.

 

도움말

이상현

류응교

류맹효

임세웅

박수현

 

사진제공

김인호

원유헌

구례군

위직량

임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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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한국일보] 운조루 유물 전시관 개관 2352
97 [대구일보] 조선 최고의 명당 운조루 4122
96 [국제신문] 청년을 위한 덕담이 없다 2967
95 [경기일보] 타인능해와 스포츠맨쉽 2807
94 [전북일보] 더불어와 운조루 2657
93 [매일신문] 화수분은 있는가? 2693
92 [한국경제]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쥬 운조루와 오미은하수 행.. 3572
91 [새전북신문] 운조루의 나무 다리 3645
90 [조선일보] 사인여천과 타인능해 3367
89 [동아일보] 나누는 자본주의, 운조루 3861
88 [한겨례] 안도현의 발견 - 타인능해- 3207
87 [동아일보]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 -타인능해 3146
86 [대구신문]‘땅콩 항공’과 운조루의 ‘타인능해’ 3486
85 나눔의 미덕 3714
84 [한겨레] 유물로 보는 ‘종가’의 나눔과 배려 3662
83 [독서신문] ‘나눔’과 ‘배려’ 3284
82 양택명당 운조루 [1] 5954
81 류성룡 후손댁 담연제 4545
80 교회의 쌀독 3684
79 나누는 자본주의 운조루-함성호의 옛집 읽기 3907
78 칼럼-조선 제일의 택지 운조루-송기옥 4319
77 c j 와 운조루 쌀독 3504
76 광주 북구, 드림스타트 '사랑의 운조루 뒤주' 설치 4148
75 [국민일보] 운조루 집주인의 시선으로 그린 ‘오미동가도’ [3] 5480
74 [한국경제] ADT캡스, 운조루 지킴이 나선다 3834
73 대한민국브랜드파워 도서에 '운조루' 5129
72 [수원일보] 운조루 쌀뒤주’에 담긴 베품의 교훈 5410
71 [다음 블로그] 구례 운조루(雲鳥樓) [1] 17267
70 타인능해-새전북신문 7877
69 운조루의 호랑이 뼈-조선일보 5384
123
운조루 11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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