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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류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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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류씨 오미동 운조루 계보
文化 柳氏 昆山君派 求禮 五美洞 雲鳥樓 家係譜 
 
  
  文化柳氏 大丞公 30 世孫 五美洞 後孫家系繼承表

        29세손---希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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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세손-----榮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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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세손-----爾冑 (호-歸睌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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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세손-----德浩 (호-隨分室 )

                            l

       33세손----  億

                            l

       34세손-----見龍

                            l

       35세손-----濟陽       ---         濟永

                                                (손이없음)

                            l                        I

       36세손-----永桓  -   麟桓   - 鳳桓 ((양자)                -            龜桓              -             龍桓

                            l            I           l                                           I

       37세손-----瑩業        瑩直       瑩百                                      瑩陸

                             l           I          l                                             !

       38세손-----曾敎      光培     孟孝=-萬基 -應敎 (시인)               子孝(시인) 大孝  東孝

                            l                      !       !       !

       39세손-----鐘叔                    鐘淳  鍾賢   鍾守  -鍾安- 鐘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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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세손-----鴻洙                                     朱姸

 

운조루는 유이주가 유배를 당하는 불우함을 잊기위해 대구에서 구례를 찾아와 말년을 은둔할 심산으로 지은 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렇지만 이 집터를 잡아 상량도 하기전에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아 영달이 시작되고 그 자손들도 계속 초창기의 복록을 유지하였으므로 지리산록명지중의 산 증거처럼 풍수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왔다.앞서 유씨일가의 일기를 통해 살폈듯이 이미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 때부터 풍수지리명당을 믿는 사람들이 옮겨오기 시작했지만 일본제국에 나라를 빼앗긴 일본식민시절 이곳을 찾아 온 이들에 의해  두 동네가 생겨날 정도로 유씨일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반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관대작이 나온 집안은 아니라는 특징도 흥미를 끈다.
 
★(2대)유덕호 (柳德浩,1757~1815)
오미동에 터를 잡은 유이주의 사촌동생 유이익의 둘째 아들로 종백부인 유이주의 집안일을 돕다가 34세때인 1790년 유이주의 양자로 입적했다.호가 수분실이며 죽은뒤 호조참판의 증직을 받아 추사 김정희가 쓴 묘지명을 남겼다.토지면 토호 재령이씨 이시화의 딸과 결혼해 3남2녀를 낳았으나 가대는 그의 친동생 광호의 아들 억을 양자로 들여 운조루를 관리케했다.
 
★(3대)유억(柳億,1796~1852)
유덕호의 친동생(유이익의 9남)으로 유덕호에게는 서자뿐이므로 유이주의 대를 이어 운조루를 맡았다.30세때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감영의 중군,평안도 병마절제사겸 토포사등 벼슬을 했다.그는 늙어서 집에 돌아와 그의 호를 딴 원석집(圓石集)을 남겼으며 화첩,장서 등을 수집해 오늘날 많은 유품이 전해온다.그는 당호를 족한정(足閒亭)이라 했다.견용,택선,주선,방선등 네 아들을 두었으며 견용이 운조루를 맡았다.두째 택선은 1851년 무과에 급제,현감 및 오위장을 지냈다.그의 아들 제관은 여산,금산,광양군수 등을 지내고 갑오동학난 때 관군편에 서서 전라좌도소모사를 맡았다.
 
★(4대)유견용(柳見龍,1817~1851)
아버지 유억이 죽기 1년전에 35세의 나이로 죽어 큰 행적을 남기지 못했다.제양과 제영 등 두아들을 두었다.
 
★(5대)유제양(柳濟陽,1846~1922)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 이듬해에 할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숙부인 택선의 보살핌을 받으며 독서에 열중해 77살에 죽기까지 1만여편의 시를 썼다.특히 그는 아버지가 죽던 1851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죽도록 일기를 써서 시언(是言)이란 기록을 남겼다.
큰 아들 영환이 일찍 죽자 손자에게도 일기를 쓰도록 지도해 구한말과 일본식미시절의 사회변화와 풍습을 알 수 잇는 자료가 되고 있다.그는 매천 황현,소천 왕사찬,해학 이기 등과 폭넓게 교류했으며,농사일기,동 향학, 면 향약 등 많은 기록을 남겼다.두 부인에게서 다섯 아들을 두었다.
 
★(6대)유영환(柳永桓,1869~1892)
아버지 이산공의 가업을 돕고 살다가 23살의 나이에 요절했다.형업이란 아들과 딸 하나를 남겼다.
 
★(7대)유형업(柳螢業,1886~1944)
나이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밑에서 자랐다.열 세 살 때부터 일기를 스기시작 1937년까지 무려 40여년간의 일기를 남겼다.기어(紀語)란 이름으로 남긴 이 일기는 그의 할아버지가 씨를 많이 슨데 견주어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적어 대한제국의 패망과 3·1만세,지적측량,신식학교제도 등 근대화과정을 살필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의 일기를 통해 금환락지를 찾아 몰려온 이사자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다.두 아들을 두었다.
 
★(8대)유증교
민선 면의원 부의장을 했다.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이 여순반란때 경찰에 의해 죽어 둘째아들 종숙이 운조루를 맡았다.
 
★(9대)유종숙(柳鍾淑,1930~1991)
 
★(10대)유홍수(柳鴻洙,1954~)
고등학교를 나와 아버지를 이어 운조루를 관리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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