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택리지가 말한 구만들>(Ⅰ장 3-3)에서 이중환이 말한 구례 구만들에 대한 기록을 살핀바 있다. 그는 가거지(可居地)중 '가장 살만한 곳' 여섯 곳 가운데 세 번째로 전남 구례를 보기로 들었다. 이중환은 다시 부연해 설명하기를 '오직 九灣만은 시냇물가에 임하여 강산과 토지가 훌륭하며 작은 배와 어염의 이익도 있어 가장 살만한 곳'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구만들의 장점을 감여서를 들먹여 좋은 곳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지리환경으로 보아 살만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어 <복거총론>에서 지리산을 설명하면서 그 계곡의 하나인 '구만'을 설명하고 있다.

<시냇가의 살만한 곳(溪村)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가 으뜸이다. 고개를 떠나서 들가운데 내려 앉은 시냇마을은 이루 다 손꼽을 수가 없다. 公州)의 갑천(甲川)이 첫째이고, 전주의 율담(栗潭)이 둘째이며 청주의 작천(鵲川)이 셋째이다. 서산(瑞山)의 감천(甘川)이 넷째이고 구례의 구만이 다섯째이다. 본디 지리산은 동쪽에 지맥이 있고 전라도쪽인 서쪽에는 지맥이 없으나 오직 홀로 한 지역이 서쪽으로 뻗어 구만에 닿아 끊어졌다. 구만은 잔잔한 물이 굽이쳐 돌고 강 너머에는 오봉산(五峰山)이 남쪽에서 조회한다. 두 도 사이에 끼어 재화를 쌓으며 나르는 곳이고 들이 모두 기름지다. 대개 구만을 다른 계촌과 비교하면 생리가 넉넉하다. 앞서 든 다섯 시냇마을은 지리와 생리가 모두 극히 아름다워서 도산(陶山)이나 하회(河回)에 견주면 더욱 훌륭하나 고개에서 떨어진 것이 조금 멀기 때문에 다만 평시에는 살만하지만 전쟁이 나면 피난가는데 불리하다. 시냇가에서 살려면 반드시 고개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야 좋다.>

이 점에서 살필 때 구례 '구만들'은 계촌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들가운데 앉아 계천과 강을 끼고 있으면서도 등뒤에 높은 산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환의 이론에 따른다면 구만들은 평시에 살만하면서 난리통에도 뒷산으로 숨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이 이론과는 너무나 달랐다. 쉽게 숨을 산과 고개가 있었던 탓으로 이곳을 낙지(樂地)라고 찾아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시련과 고통을 주었다.
물론 이곳의 옛 구역이름 토지(吐旨)라는 낱말 자체가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미 제2장 <구만들의 지리>편 「역사 있는 이웃동네」편에서 밝힌바와 같이 구만들의 동쪽 들목 석주관에는 고려말엽 왜구들을 막기위해 성을 쌓았었다. 다만 그때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뿐이다. ≪고려사≫나 ≪대동지지≫ 등 기록을 보면 1350년인 충정왕 2년에 구례조공선이 왜선에 털리고 1384년인 우왕 10년에는 아얘 구례가 함락당했다고 적혀있다. 이어 창왕(昌王)때도 구례 등이 왜구에 털린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구만들에 살던 사람들도 온전치 못했음이 분명하다. 우왕때는 왜군이 구례를 거쳐 남원까지 진출했으므로 이성계장군이 삼도도순찰사가 되어 운봉 인월역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했다. 이때 패주하던 왜군들은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이곳에 모셔져 있던 성모사 석상에 칼질을 해 상처를 입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 왜구들은 2백10년 뒤인 1592년 다시 이나라를 침략해왔다. 다행히 이때 구례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않았으나 이듬해 구만들은 침해를 당했으며 5년뒤인 정유(丁酉)재란때는 전라도가 공격목표가 되어 큰 싸움터가 되었다.
예부터 이 길목이 왜구의 침입로로 이용되어온 것을 역사기록을 통해 알고 있던 조정과 이곳사람들은 석주관을 굳게 지켰으나 일본군의 총포를 이기지못하고 남원으로 후퇴해 결국 이곳 주민들에게 한을 남겼다.
왜병들은 이 길목을 거쳐 남원, 전주지방에 주둔해 있으면서 계속 이 길목을 지원수송로로 이용하고 있었으나 관군이 고을을 비워버린 상태에서 이 길목을 지키는 길은 의병밖에 없었다. 그래서 왜병이 이곳을 지니간 한달만인 9월 광의면 남전리(藍田里)출신인 왕득인(1556년생?당시 42세)이 중심이 되어 50명 가량의 의병대를 결성, 석주관을 지나는 왜적을 기습해 큰타격을 입히고 전사해 그 시신마저 수습할 수 없었다. 두 달 뒤 왕득인의 아들 의성(義成?23세)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화엄사 스님 153명과 함께 석주관에서 왜군을 기습. 왜병 60여명을 죽인 다음 거의 전사해 이곳 냇이 피로 물들었다. 이탓으로 피내골(血川谷)이란 별칭이 붙고 오늘날 연곡사계곡은 '피아골'이라 부르게 된 연원을 이뤘다. 이 의병기습으로 인한 구만평 일대 주민의 왜병보복은 비록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가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금환락지라는 구만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임란이후에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가계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