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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joru?
운조루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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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금환락지와 운조루 아흔아홉칸 집

               

  지리산이 드넓게 펼쳐 놓은 오지랖은 세상을 등지고 떠나 온 사람들에게 고향과도 같다. 생전에 만져 볼 땅 한 뼘 갖지 못한 운명이었거나, 자신의 부귀영화를 자손만대에 까지 누리고자 길지(吉地)를 찾아온 만석꾼 부호이거나, 아니면 새세상을 세우려다 쫓겨 온 반란의 무리이거나 지리산은 묵묵히 이 모두를 자식처럼 감싸안고 살아 왔다.

  그래서 지리산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절로 숙연해 진다. 허허벌판에 쫓기는 도망자를 자신의 치마폭에 감추어 준 어느 여인의 이야기처럼 지리산 자락에 스며 있는 사연들은 절절하기만 하다. 한때 저 산등성이에는 속살 깊숙이 융단폭격이 내렸고 골짜기에는 동족상잔의 아픔이 넘쳐 흘렀다. 밤을 낮 삼아 타오르던 불길 속에서 울부짖던 날들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리오만 그래도 세월이 흘러 지리산 상봉의 흰구름은 옛일을 잊은 듯 피어오르고 있다.

남한 3대 명당

  지리산은 그 후덕한 기운 탓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3대 명당인 금환락지(金環落地)를 만들어 놓았다. 해발 1506m의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 섬진강 줄기와 만나면서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는데 그 천하대지가 구례 들판 어느 곳엔가 위치한다는 비기가 전해 왔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가 그곳이다. 구례읍에서 경남 하동포구 쪽으로 가는 19번 도로를 타고 약 5km쯤 달려 가면 기름진 들판을 만나게 되는데 들판 아늑한 곳나다 옹기종기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속칭 '구만들'이라 부르는 이곳의 마을들은 모두가 금환락지 명당터를 잡기 위해 외지인들이 몰려와 개척한 곳이라고 한다.

  특히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난세를 피해 찾아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좋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토지면 가구수와 인구 변동의 연도별 통계를 살펴보면 1918년 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1922년 148호에 744명에 이르고 있어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대이동을 볼 수 있다.

  나라는 망하고 일제의 수탈은 날로 가혹해지고 난데없이 몰려온 서양문물이 판을 치는 격동기의 급류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였던 사람들은 환란의 세월로부터 몸을 숨겨 안위를 구하고자 찾아들었던 것이다. 순천 부자 장씨 집안이 금내리로 이사해 올 때 그 행렬이 십 리까지 뻗쳤다는 구전도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옛 사람들이 믿었던 비기인 즉 봉성(구례의 옛 이름) 현 동쪽에 대지가 있는데 이곳에 터를 잡으면 무장이 천명 나오고 문장이 만명 나오며 백자천손으로 후손이 벌족하여 가히 만 호가 살 수 있는 땅이고, 모든 성받이가 함께 발복할 명당이라는 것이었다.

지리산 미녀와 금환락지라는 곳

  옛 지사(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잡은 구례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음(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성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명혈(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가락지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 행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금환락지라는 곳은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다.

  현재 토지면(土旨面)의 지명도 본래는 금가락지를 토해 냈다는 토지면(吐指面)이었는 바 모두 이와 같은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또 어떤 이들은 금환락지는 지리산의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하고 그때 비녀도 함께 떨어뜨렸는데 그곳은 금잠락지(金簪落地)라 ㅠㅛ현하기도 한다.

  구례 금환락지의 풍수적 형국은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에서부터 그 신령스러움이 흘러오는데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용(龍)이 천황치에서 건너편 왕시루봉 줄기와 어우러져 섬진강을 끌어안은 모습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고 안산(案山)으로는 강 건너 오봉산이 머리를 조아리며 춤을 추고 있다.

  또 이곳은 우리나라 풍수지리가 태어난 탯자리이기도 하다. 구례에서 금환락지를 찾아가기 바로 전 마을이 장수촌으로 이름난 상사리(上沙里)와 하사리(下沙里)인데 도선국사가 이곳 모래밭에서 우리나라 산천 모습을 그려 놓고 공부하여 풍수지리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쳤다는 곳이다. 그래서 도선국사가 모래밭에 그림을 그린 곳이라 하여 사도리(沙圖里)라 부르기도 한다.

  금환락지는 또 다섯가지가 아름답다 하여 오미동(五美洞)이라 불렀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며, 풍토가 윤택하여 다섯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좋은 터전인데다 관청과의 거리도 멀어 관리의 횡포로 부터도 안전하였고 난세에는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몸을 숨길 수도 있는 곳이었기에 혹자들은 이곳을 가리켜 두 마리의 학이 춤추고 있는 쌍학지지(雙鶴之地) 청학동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아흔아홉칸 기와집 운조루

  구례 금환락지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양택지는 운조루(雲鳥樓)이다. 이 들판의 영화로운 시절과 슬픈 이야기를 한 몸에 담고 있는데 호남지방에서는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운조루는 오미동 유씨 집안의 사랑채 누마루의 이름이지만 문화재 이름이 구례 운조루라 되어 있어 흔히 이 아흔아홉칸 기와집을 운조루라 불러온다.

  이곳에 아흔아홉칸의 대저택을 세운 사람은 삼수공(三水公) 유이주(柳爾胄)였다. 유이주는 1726년 경북 해안면 입석동 출신으로 28세 되던 1753(영조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개와 힘이 뛰어났고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났을 때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 버렸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담대했다. 또 벼슬에 있을 때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함흥성 축조작업 등 대규모 건축사업에 봉직하여 운조루 창건자로서 손색없는 경력을 보여준다.

  창건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말해주는 유이주의 행장에는 "세상 사람들이 이 오미동 집터를 길지라고 했으나 바위가 험하여 누구도 감히 집터로 할용하지 못한 것을 공(公)이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고 말하며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터를 닦았다."라고 나와 있다.

  유이주는 경북 대구 사람인데 그가 이곳으로 이주해 온 배경은 전라도 승주에서 낙안 군수로 재직하였던 시절 금환락지 명당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안 군수 시절, 관직에서 은퇴하면 이곳에 세거를 이룰 것을 작정하고 그때부터 운조루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다. 운조루의 대역사는 7년에 걸쳐 진행되는데 1776년에 유이주가 함흥성 오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는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천리길을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 구례 오미동에는 금환락지와 더불어 3대 진혈(眞穴)인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있는데 유이주가 잡은 터는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 있다는 금구몰니 명당이라고 한다.

  집터를 잡으면서 땅을 파보니 금구몰니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어린아이 머리크기만한 돌거북이가 출토되었다는 것.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부엌자리에 안방을 배치해야 할 구조였으나 거북자리를 안방으로 사용하면 아궁이에 불을 때기 때문에 거북이가 말라 죽는다고 거북이가 나온 곳을 습기 많은 부엌자리로 배치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다섯가지 보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도움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명당으로 통한다.

  이 세 명당은 오미동 구만리 들에서 상대 중대 하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집터가 그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운조루 주인은 자기집 안채가 상대 금구몰니이고, 중대 그환락지는 행랑채 밖 연못자리이며 하대는 면 소재지에 있는 돌탑자리라고 한다. 한편 환동(環洞) 박 부자 집터 역시 그곳이 금환락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원내리(垣內里) 사람들도 자기네 마을을 오보교취의 하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금내리(金內里) 사람들은 금환락지가 자기 동네 안에 있기 때문에 금내리라고 말한다.

  이렇듯 오미리 일대 풍수촌들은 도선국사가 풍수지리를 깨우친 탯자리답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간직되어 있어 가히 풍수지리가 춤추고 있는 땅이라 할 수 있다.

운조루의 슬픈 이야기

  운조루는 1776년 건립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설계도와 같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家圖)>라는 그림이 남아 있어 그 원형을 살필 수 잇다.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은 一자형 행랑채와 T자형 사랑채 그리고 ㅁ자형 안채가 연이어져 있고 동북부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700평이 넘는 대지에 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있으며 남향의 건물들이 동서와 남북측을 주방향으로 직교하여 비를 맞지 않고도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일체화 되어 있다.

  안채는 중문간을 통하여 사랑채와 연이어져 있고 안방과 대청, 건넌방, 다락, 곳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은 안주인의 일상 거처실이자 침실이며 대청은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위치하여 집안의 큰 일을 치루는 중심공간으로 사용된다. 네모 반듯한 마당 아래쪽에는 부잣집 살림규모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장독대가 있고 안방 부엌 앞 처마 밑에는 허드렛 물을 받았다가 사용하던 수조와 맷돌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운조루의 건축적 특징은 누마루방이나 누다락방을 두어 스케일이 웅장한 궁전주택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공포와 같은 장식적 의장을 생략하여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정남향의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아래채 기와지붕 너머로 안산격인 오봉산이 유유히 흘러가고 햇볕은 처마 깊숙이 들어와 더없이 다사로운 기운을 뿜어 준다.

  명당 터 덕을 보았는지 이 집안은 대대로 부를 유지하며 가문의 명예와 권위를 드높였고 양반가로서의 특권을 누려 왔다. 창건주 유이주가 후손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남긴 기록을 보면 최소한 78칸에서 100여 칸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물이었으며 한때는 100여 명의 식솔을 거느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운조루 문화 유씨 종택은 기울 대로 기운 집안이다. 99칸의 건물은 60칸으로 허물어졌고 농토는 30여 마지기 정도로 흩어질 대로 흩어졌다. 더구나 운조루가 세상에 알려지자 도둑이 들끓어 가보로 내려오던 돌거북과 함께 많은 유물들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

  일자로 늘어선 행랑채와 웅장한 규모의 솟을대문은 옛날 그대로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처럼 쓸쓸하다. 그나마 집안을 관리하며 유품을 보존해 오던 유종숙 씨가 최근에 병을 얻어 광주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수술을 받으러 떠나 집안의 분위기는 더욱 적적해 보인다.

  구름 속에서 학이 노닐었다는 운조루 누마루는 주인을 잃은 지 오래요, 아흔아홉 칸 집 마나님이 거처했던 안채도 집안 일을 돌볼 수 없는 부족한 일손 탓인지 버려져 있다. 대청마루에는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고 기둥마다 적혀 있는 삼강오륜의 문구들도 세월의 무게를 어찌하지 못하고 남루해 졌다. 사람의 자취가 끊긴 옛 방들은 들어가 보면 헛간처럼 퀘퀘하고 을씨년스러울 뿐 위세높았던 운조루 대갓집의 면모는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를 일러 세월의 무상함이라 말하던가. 저물녘 온 대지에 스미는 황혼의 처연함처럼 운조루에는 한 세월의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한 줌 재처럼 사그러지고 말 그런 슬픈 빛깔과 함께..

  하지만 운조루의 역사를 더듬어 가다 보면 절로 머리 숙여 경건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흥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게 마련인 세상의 순리대로 자신들이 누려온 부를 이 들판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줄 줄 아는 그런 넉넉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조루 집안이 몰락하게 된 것은 일제 식민통치의 토지조사 사업으로  대부분의 농토를 빼앗기고부터이다. 이는 곧 호남지역의 권문세가였던 이 집안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거부하고 지조를 지킨 것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지주들이 친일파가 되어 일족의 부와 권세를 축적하였던 사실과 비교하면 운조루의 몰락은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그 길을 함께 한 어떤 지사적 편린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아홉 번째 종손이었던 종숙 씨의 형 종택 씨가 지금도 알 수 없는 이름모를 어느 산자락에 묻혀있음에야..

  문화 유씨 가계표를 들춰보면 종택 씨의 빈 칸에는 생몰연대도 나와 있지 않고 단지 후사 없음, 부인 재가라고만 나온다.

  여순반란 사건 때 김지회 부대가 문수리골에 거점을 두고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때다. 어느날 밤 오미동 마을 전봇대 일곱 개가 줄줄이 잘려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군경의 통신망을 끊어 놓기 위한 빨치산들의 작전이었는데, 다음낭 오미리 청년들이 빨치산과 내통하는 좌익으로 몰려 어디론가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종택 씨는 그들과 함께 불행했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거점이었던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아흔아홉 칸 집 운조루가 살아남은 것도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배려가 있었음과 무관하지 않다. 주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운조루 사랑채는 빨치산들이 쉬어가던 아지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집안에 내려오던 보검은 김지회 대장이 말을 타고 다닐 때 옆에 찼던 칼이라고 한다. 운조루 사랑채 대청마루에 앉아 저 멀리 오봉산 자락을 바라보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는 것도 두고두고 가슴 뜨거운 일이었다.

운조루 후일담

  나는 1991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구례 금환락지와 지리산 밑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몇 차례 취재여행을 떠났다. 그때 금내리 노인정에서 어느 촌로에게 운조루 집안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운조루 9대 종손 유종택 씨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사회주의자로 6.25때 빨치산이 되어 아직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지리산 밑에서 운조루와 같은 대지주집이 어떻게 온전하게 보존되었을가 하는 의문이 일시에 풀려 나가는 듯한 짜릿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씨티라이프』 '문화유산을 찾아서'의 운조루편에 이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문제가 발생했다. 그 글을 읽은 모 방송국의 PD가 그 삼삼한 '꺼리'를 놓치지 않고 취재를 갔던 모양이었다. 확인해 보니 그런 사실이 없었고 이를 알게 된 운조루 집안에서는 된통 난리가 났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던 나를 찾아내어 항의전화를 하였는데 취재원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운조루 집안에는 그와 비슷한 일로 상처가 깊이 패어 있었다.

  윗 대의 어른들이 부잣집 위세답게 첩들을 두었는데 그 후손들이 6.25때 행방불명된 유종택 씨가 사망신고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재산 상속 문제로 법정 시비까지 진행된 터였다. 당시에 유종택 씨의 아버지가 "내 자식은 이승만(경찰)이가 죽였으니 내 손으로는 사망신고를 할 수 없다"고 한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용서를 빌었으나 아픈 상처가 쉬이 덮어질 리 없었다. 더욱이 운조루 집안에서는 자기집과 적대적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제보한 것으로 알고 명예훼손죄로 공격을 취할 태세였다. 나는 백배사죄하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꽃샘추위가 몰아치던 날 운조루를 찾아갔다. 그 때는 집안의 큰 기둥이셨던 유종숙 씨마저 병환으로 돌아가신 후엿고 운조루는 더욱 쓸쓸해져 있었다. 점심식사까지 같이 한 적이 있었던 내 얼굴을 알아보시고 아주머니는 미움 반 반가움 반으로 혀를 차셨다.

  "으째 그렇게 내 가심을 아프게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도 반쯤은 눈물이 차 있었고 나도 울컥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때 보았던 운조루 아흔아홉 칸 집은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차라리 호통이라도 치셨으면 마음 편하였을 것을 아주머니는 이미 용서하고 계신 터였다.

  젊은 사람 앞날에 혹시라도 누가 되면 안된다고 앞으로는 잘 좀 써달라는 말만 하셨다. 추운 날씨에 찾아오느라고 고생했다는 인사까지 받으며 운조루를 나서면서 나는 목젖이 따갑도록 참담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을 써서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주기는 커녕 되레 그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기나 하고 있으니, 내 자신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마음을 풀 길이 없어 무던히도 금환락지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운조루 뒤 베틀봉에 자리잡고 있는 삼수공 유이주의 무덤에 올라가 구만리 들판을 망연자실 내려다보기도 했고, 회정리에서 봉소마을로 넘어오던 옛나루터에서 매운 강바람을 맞으며 겨울나무처럼 붙박혀 서 있기도 하였다. 그날 나는 나의 비가처럼 참으로 오랜만에 시 한 편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가 졸시 「시목나루」이다.

  운조루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날의 감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다시 한번 이 자리에 적어보고자 한다.

    섬진강변 시목나루

    바람만 예전처럼 휭휭 지나고

    지금은 잊혀진 나루라네

     

    시루봉 능선에서 내려다보면

    물결 속에 출렁이는 산자락을 타고

    이슬 맞는 애비들이 강을 넘던 곳

     

    돌아보면 꿈결처럼 강물이 흐르고

    쌍 무덤가 소나무 홀로 서 있는

    선 떨어진 빨치산이 쓰러져 눕던 곳

     

    인정이 말랐는지 세월이 말랐는지

    나룻배도 뱃사공도 떠나가 버리고

    해 저물면 첨벙첨벙 발자국 소리

     

    주막집 너머 바람만 휭휭 지나고

    섬진강변 시목나루

    지금은 잊혀진 나루라네.

     

찾아가는 길

  구례에서 연고사, 쌍계사, 하동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토지면 소재지에 내리면 이 일대가 금환락지의 들판이다. 운조루는 이곳 여러 마을 중 오미동에 있다. 창건주 유이주 무덤은 운조루 뒤편 베틀봉이라는 산등성이에 있고 시목나루는 구만리 들판과 섬진강 건너 문척면 회정리를 오고 가던 나루터다. 지금은 나루터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강변에는 봉소대(鳳巢臺)라는 정자가 있다. 운조루와 함께 답사할 곳은 화엄사와 천은사, 장수마을 사도리, 매천사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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